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명남 Headshot

르포르타주 만화가, 남극 운전사가 되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인쇄

[김명남의 과학책 산책]

남극의 여름 | 프랑수아 르파주·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박홍진 옮김/길찾기(2016)

"모든 사람의 서가에는 자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나의 오랜 믿음이다. 이 책꽂이에는 나머지 장서와는 관계없는 주제들을 가진 이상한 책들이 몇 권 모여 있는데, 가만 보면 장서 임자의 면모가 드러난다. (...) 나의 자투리 책꽂이에는 극지방 탐험에 대한 책 64권이 꽂혀 있다."

이렇게 시작되는 앤 패디먼의 글(<서재 결혼 시키기> 중)을 읽은 뒤, 나는 내 자투리 책꽂이도 극지방을 주제로 삼으리라고 결심했다. 일류 에세이스트인 패디먼의 글이 워낙 흡인력 있기도 했지만, 내가 원래 남극에 매력을 느낀 탓도 있었다. 지구에서 최후로 발견된 대륙, 300년 전만 해도 지도 제작자가 제멋대로 그 모양을 그려 넣었고 그곳이 푸르른 낙원이리라 기대한 사람이 수두룩했던 땅, 스콧과 아문센과 섀클턴의 영웅적 드라마가 새겨졌으며 그로부터 겨우 100년 뒤인 지금은 매년 2만 명씩 관광객이 찾는 땅, 2048년까지 모든 자원 개발이 금지되었고 오직 과학적 목적으로만 평화로이 사용되는 땅. 나의 상징적 자투리 책꽂이에는 남극에 관한 책이 착착 꽂혀 나갔다. 그리고 얼마 전 거기에 <남극의 여름>이 더해졌다.

2016-09-09-1473407600-3517285-KOR9788960520028.jpg

체르노빌 원전을 기록한 <체르노빌의 봄>으로 알려진 만화가 엠마뉘엘 르파주는 프랑스 극지연구소로부터 남극의 기지들을 방문하여 그곳 연구를 널리 알리는 만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엠마뉘엘은 사진가인 동생 프랑수아까지 끌어들여, 그림과 사진을 섞은 책을 쓰기로 한다. 형제의 피를 끓게 한 것은 그들이 방관자로 관찰만 하다 오는 게 아니라, 프랑스의 해안 기지에서 내륙 기지까지 1200㎞를 달려 보급품을 운송하는 수송단의 트랙터 운전사로 직접 임무에 참가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모험은 성사되었고, 책도 나왔다.

호주에서 남극까지 배를 타고 건너간 13일, 이어서 트랙터로 남극을 달린 13일의 기록이 책의 전후반을 이루고, 사이사이 옛 탐험의 역사와 현재의 연구들에 대한 소개가 끼어든다. 그러나 책이 선전물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 집중하는 건 사람들이다. 만화가는 기후학자, 지구물리학자, 해양학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묘사함으로써 그곳에서 진행되는 기후학, 지구물리학, 해양학 연구를 소개한다. 물론 요리사, 의사, 발전기 기술자 등도 있다.

대체로 흑백이다가 가끔 나타나는 파스텔톤 색깔들로 묘사된 남극은, 탐험대에 반드시 전속 화가를 포함시켜 그림을 그리게 했던 20세기 초까지 극지 탐사의 전통을 이 책이 잇는다는 것, 놀랍게도 지금도 오직 그림으로만 묘사될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걸 증명한다. 온통 희지만 터키색, 청금색, 황토색이기도 한 얼음, 햇빛이 반사되어 노랗게 보이는 대륙, 푸르고 검은 기하학적인 무늬로 조각난 부빙의 바다.

남극은 양면적이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위험과 고독에 끌리는 부류이지만, 그 고립된 세계에서는 타인을 배려하고 사교하지 않는 사람은 제정신을 지킬 수 없다. 가장 최첨단의 연구가 이뤄지는 곳이지만, 요즘도 더러 악천후로 사람이 죽고 인간이 무조건 자연에 맞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오지다. 기록적으로 더운 북반구의 한여름에 남극의 여름을 읽는 나도, 그걸 꼭 겪는 듯했다. 책을 덮을 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내 자투리 책꽂이에서, 이보다 더 공감각적인 책은 또 없을 것 같다. <끝>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