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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인간, '물리학 스타'들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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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남의 과학책 산책]

불멸의 원자 | 이강영 지음, 사이언스북스(2016)

"과학자가 어떤 업적을 남기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속한 시대다." <불멸의 원자>에 나오는 이 말을 살짝 비틀면, 과학의 어느 분야에서 천재가 많이 나오느냐를 결정하는 것도 시대다. 천재를 어떻게 정의할 거냐 등등 당연한 항의는 모른 척 넘어가겠다. 요컨대 어느 시대 특정 분야가 발견의 약속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천재 집단을 구축하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캐번디시 연구소가 노벨상의 요람이 된 건 터가 좋아서가 아니고, 어니스트 러더퍼드처럼 시의적절하게 가능성을 감지하는데다 남을 키우는 데도 능한 천재가 마치 한 중성자가 연쇄반응을 일으키듯이 다른 천재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천재들의 무리 중에서도 내가 처음 과학사를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제일 좋아하는 무리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원자를 해독하고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두 기둥으로 현대물리학을 구축했던 이들이다. 마침 노벨상이 1901년부터 수여되었기에 이들 다수가 수상자로 이름을 날린 점, 과학사가 가장 철저히 연구한 대상이 이들이라는 점, 이후에는 대개의 발견이 대규모 협동작업과 자본에서 나오는지라 개인이 이름 날릴 기회가 적다는 점 등등 이 선택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모른 척 넘어가겠다. 막스 플랑크, H.A. 로렌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마리 퀴리... 이런 이름들이 참가했던 1927년 솔베이학회 단체사진 앞에서(이 책 뒤표지를 보라) 성호를 긋지 않기란 불가능하며,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먼, 머리 겔만... 이런 이름들 앞에서 좋아하는 스타를 보는 듯 설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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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솔베이학회 참석자들. © 위키피디아

<불멸의 원자> 2부는 그런 물리학자 10여명을 소개한 짧은 글들로 이뤄졌다. 원래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연구센터(APCTP) 웹진 '크로스로드'에 연재되었던 글을 묶은 책의 1부는 원자의 발견을, 3·4부는 표준모형 기본 입자들의 발견을 소개하므로 전체를 다 읽으면 핵입자물리학의 역사를 개괄하게 되는 셈인데, 그 속의 보석이 2부다.

물리학자인 저자가 존경과 공감을 담아 담담하게 펼친 천재들의 드라마는 몹시도 재미나거니와 폴 디랙이나 존 폰 노이만처럼 변변한 대중적 전기가 번역되지 않은 인물들 위주라서 더 흥미롭다. 아인슈타인의 가장 좋은 친구로만 알기엔 미안한 파울 에렌페스트의 학자이자 스승으로서 아름다운 삶과 비극적 종말, 전쟁 중 산에 숨어 가이드 노릇까지 했던 게 훗날 산꼭대기에 올라 우주선을 감지하는 업적에 도움이 되었다는 일화로만 알려지기엔 아까운 영화 같은 삶의 주인공 주세페 오키알리니, 전성기와 분야가 무의미할 만큼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던 20세기 최고의 천재 존 폰 노이만과 13살 때부터 친구로 지내며 평생 같은 길을 걸었기에 자신도 천재임에도 그토록 겸손했을지 모르는 유진 위그너. 참, 아인슈타인이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살롱에 다녔다는 걸 다들 아는지?

인간은 필멸해도 인간을 이루는 원자는 불멸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 그게 물리학이 안기는 숭고미다. 그러나 그 불멸의 원자들이 한순간 특별하게 조합되어 우리가 불멸의 인간으로 기억할 이름들을 남겨준다는 것, 그 또한 숭고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