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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대화할 때 생각하는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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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섭외의 기억' 글에서 이야기했듯, '이동진의 문화야 놀자'는 내게 특별한 프로그램이다. 나는 이동진이라는 진행자가 최대한 매력 있어 보이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사실 어느 PD나 그러긴 한다). 방송 시간이 50분 정도 됐는데, 그게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이동진 씨는 정말 아는 게 많은 사람이고, 그걸 재미있게 풀어낼 줄도 아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50분 안에 담아내기에는 그가 품고 있는 세계가 너무 방대했다.

매번 방송 시간의 두 배쯤을 녹음해서 편집했는데, 최대한 그의 말을 살리고 싶어서 갖은 재주를 부렸다. 말을 고르느라 '음...'하고 머뭇거리는 시간은 무조건 들어냈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짧은 침묵, 방송가에서 보통 '마가 뜬다'고 표현하는 그 공간도 최대한 잘랐다. 급기야 '제,제가 오늘...'하는 식으로 버벅이는 부분이 있으면 앞의 '제'자를 잘랐다. 나는 최대한 그의 이야기를 많이 담아내고 싶었고, 낭비되는 시간이 아까웠다. 이동진 씨는 당시에도 라디오 방송을 오래 해온 베테랑 출연자였다. 방송이 나간 걸 듣고 내게 "편집을 정말 많이 하셨더라고요. 고생 하셨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때는 '아,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는 그게 순수한 칭찬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조각조각 편집하는 게 정말 괜찮은 방식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얘기를, 예의 바른 그가 돌려서 말한 건 혹시 아니었을까.

시간이 좀 지나고 그때 내가 편집했던 방송을 들어보니,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동진의 말만 있고 이동진이라는 사람은 없는' 느낌이었다. 그가 버벅이는 부분, 어색하게 들리는 부분,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모두 뺀 편집본을 두고 당시에는 '와우, 내 편집 신공 좀 보소. 사람 하나를 아나운서로 만들어 놓았네!'하고 만족해 했는데, 내가 잘라낸 그의 사소한 습관이나 말버릇이 결국은 그 사람의 인간미였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대화란 무엇일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무엇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이라도 주고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버벅이는 부분, '음...'하고 머뭇거리는 순간, 말 고르는 동안의 침묵, 했던 말 또 하는 단어의 낭비 등등, 매끄럽지 못한 그 모든 시간 속에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의 무언가가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특히나 아이와의 대화에서는 아이가 하는 말의 내용보다 그 외의 부분에서 많은 걸 느끼게 된다. 심지어 아이가 그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메시지가 되기도 하니까. 내가 편집했던 방송과는 반대로, 말의 내용은 없어도 말한 사람은 느껴지는 대화, 그게 아이와의 대화인 것 같다.

1

2.

나는 아이와 이야기할 때 좀 많이 건조한 편이다. '아기 말투'를 잘 사용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나의 성향이다. 오글거리는 걸 못 견뎌 한다. 어른에게 말 할 때와 큰 차이 없이 아이를 대한다. 언젠가 한번 하율이가 친구네 집에 놀러가겠다고 길에서 떼를 쓴 적이 있었다. 어제도 놀러갔던 친구네인데 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말했다. "하율아, 아무리 친한 사이도 계속 같이 있으면 질릴 수 있어. 떨어져 있다가 만나고, 또 떨어져 있다가 만나고, 그래야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하율이 친구 엄마가 놀라워 했다. '애한테 뭐 저런 말을 하나' 싶은 눈치였다.

아이가 내 이야기를 전부 이해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내 진지한 태도 자체를 좋아한다는 느낌은 든다. '엄마가 할머니나 아빠한테 말할 때와 나에게 말할 때 큰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것, 자신을 어른처럼 대접한다는 자부심, 엄마와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으쓱한 기분을 하율이가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처럼 귀여운 말투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자신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메시지는 주고 싶다.

물론 하율이가 조근조근(이라 쓰고 주절주절이라 읽는다) 말하는 내 설명을 늘 경청하는 건 아니다. 울며불며 계속 땡깡을 부려서 결국 이를 악물고 "그믄 흐즈..." 협박하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어른의 언어'로 길게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우선 내가 아이와의 대화에 성의 있게 임할 수 있는데다가, 말 하면서 내 생각도 정리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왜 친구네 집에 놀러갈 수 없는지를 설명하며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아이가 알아듣기 힘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때, 때론 '이게 하율이한테 하는 말일까 나 스스로에게 하는 혼잣말일까' 헷갈리기도 하다. 근데 이거, 한번 해보시라. 은근히 재미있다.

예시 1.
하율 : 엄마, 오늘도 회사 가야 돼? 나 맛있는 거 사주려고?
엄마 : 응, 엄마 오늘도 회사 가. 근데 꼭 하율이 맛있는 거 사주려고 가는 건 아니고, 회사 가는 게 엄마한테 재미있고 필요한 일이라서 그래. 하율이도 나중에 직업이라는 걸 갖게 될 텐데, 엄마가 돼서도 직업을 갖는 게 좋은 이유는 뭐냐하면....

예시 2.
하율 : 엄마, 엘사는 왜 안 나가 같이 놀자고 하는데 안 나오고 방에만 있었어?
엄마 : 아마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었나 봐. 안나한테 비밀을 말할 수 없으니까, 같이 놀기도 좀 그랬던 거지. 아무리 친해도 속마음을 다 얘기할 수 없을 때가 있거든. 엄마도 아빠랑 친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게 있어. 그럴 땐 같이 놀기 싫고, 혼자 있고 싶기도 해....

잘못된 예시
하율 : 아빠, 왜 성냥팔이 소녀가 할머니를 봤는데, 금방 없어진 거야?
아빠 : 응, 성냥팔이 소녀가 헛걸 봤거든.

3.

50년대 팝송, 도리스 데이(Doris day)의 노래 '케세라세라'의 가사를 참 좋아한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어머니에게 물었어요
난 커서 뭐가 될까요?
예뻐질 수 있을까요? 부자가 될까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어요.
케세라세라, 무엇이 되든,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내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선생님에게 물었어요.
뭘 해볼까요? 그림을 그릴까요? 노래를 할까요?
선생님의 대답은 이랬어요.
케세라세라, 무엇이 되든,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내가 자라서 사랑에 빠졌을 때 난 내 연인에게 물었어요.
우리 앞에 무엇이 있을까?
무지개가 있을까? 날마다?
내 연인은 이렇게 말했어요.
케세라세라, 무엇이 되든,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이제 난 아이를 가지게 됐어요.
아이들이 엄마에게 묻네요.
난 커서 뭐가 될까요? 잘생겨질까요? 부자가 될까요?
난 부드럽게 대답해요.
케세라세라, 무엇이 되든,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몽상하는 수다쟁이 소녀, 빨간머리 앤이 부르는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난 커서 뭐가 될까요? 예뻐질까요? 연애도 하게 될까요? 날 사랑하게 될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재잘재잘, 어른이 되었을 때를 꿈꾸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 "크면 알게 돼"라고 대충 대답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한다. "무엇이든, 어떻게든, 될 수 있단다. 예뻐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멋진 남자와 연애를 할 수도 있겠지만,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게 될 지도 몰라. 누구도 알 수 없어.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금을 즐기는 수밖에."

어쩌면 지금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이, 이런 멋진 노래 가사의 한 장면이 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꼬치꼬치 묻는 아이의 질문이 귀찮아질 때 내가 지금 도리스 데이의 노래 속에, 혹은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고전 뮤지컬이나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 속에 들어와 있는 거라고 상상해 본다. 어릴 적, 사는 게 힘들 때마다 "'소공녀'처럼 나도 어딘가에 진짜 부모님이 계신 걸지도 몰라. 그 부자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저렇게 해야지" 상상하다 보면 시간이 수월하게 지나갔던 것처럼.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