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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작가실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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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공부하는 마리아의 연구 화두는 미국 방송작가의 노동 실태이다. 얼마 전에 열린 대학원생 세미나에서 그녀는 지난 몇 년간 미국 리얼리티 TV쇼 작가실을 찾아다니며 취재한 미국 작가들의 근무 환경과 임금 체계를 요약, 발표했다. 한국에서 십 수년간 방송작가로 살아온 나로서는 귀가 쫑긋한 주제였다.

마리아가 소개한 미국 방송작가실의 풍경은 한국과 별 차이가 없었다. 자료가 널부러진 커다란 회의 탁자, 화이트보드에 매직팬으로 큼지막하게 써놓은 회의의 흔적들, 책상 파티션마다 덕지덕지 붙여놓은 일정표와 연락처, 큐시트, 포스트잇 메모지들, 그리고 잠깐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는 간이침대까지. 간혹 먹다만 피자 조각들이 굴러다니는 것도 똑같다. 업무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미국방송영화작가협회(Writers Guild of America)가 발간한 '주간드라마 작가들을 위한 안내서(Writing for Episodic TV)'의 표현을 빌면, 작가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기란 "잠수함 안에서 정해진 기일을 넘겨 여행을 하는 것처럼" 긴장되고 피곤한 일이다. 심지어 칼같이 "시간을 재는" 고참 작가들에게 책잡히지 않도록 작가실 안에서는 잡담이나 사적인 전화도 삼가라는 조언도 한다.

그런데 방송작가가 받는 경제적 보상을 따져보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미국 역시 프로그램 장르나 방송 채널, 시간대에 따라 고료가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하는 퀴즈쇼나 뉴스 매거진 프로그램 작가도 주당 최소 2000 ~ 3000 달러를 받는다. 한 달로 따지면 1만 달러가 넘는다. 이 고료 기준은 2014년 미국방송영화작가협회가 협상 파트너인 미국영화방송제작자연대(Alliance of Motion Pictures and Television Producers)와 정한 '최소기본협정 (Minimum Basic Agreement)'에 명시된 내용이다. 물론 이 고료와 별도로 네트료, 재방료, 시놉시스 및 스토리 개발비, 파일럿 또는 포맷 개발비는 물론이고 보험과 연금, 온라인 스트리밍 저작권료 등이 작가에게 추가로 지급된다.

방송산업의 규모로 보나 수익률로 보나 직업의 사회적 지위로 보나 미국 방송작가의 업무 환경과 보상 체계를 우리와 단순 비교하는 건 억지이긴 하다. 제작비부터 최소 몇 배는 차이가 나는 형편이니 억소리 나는 미국 작가들의 고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렇다면, 배 아프도록 부러운 미국 방송작가 고료시스템에 허점은 없을까? 마리아가 들려준 리얼리티 TV쇼 작가들의 실상은 장장 600페이지가 넘는 '최소기본협정'에는 없는 이야기였다. 12,000여 명의 회원을 보유한 미국영화방송작가협회가 2007년 100일 간의 파업기간 동안 인기 드라마 시리즈의 집필도 거부하고 골든 글로브 시상식까지 취소시키는 위력을 발휘하여 온라인 저작권에 대한 보상을 따냈지만, 상당수의 리얼리티 TV쇼 작가들은 이 모든 권익으로부터 배제되었다. 협회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모름지기 '대본'을 '창작'하는 능력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으로 보면, 정해진 대본 없이 미리 짜놓은 상황에 특출난 캐릭터들을 던져놓고 그들이 벌이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작가인 듯 작가 아닌 작가'들이 쓰는 애매모호한 쇼일 따름이다. 전체 프라임타임의 17%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끄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했지만, 딱히 어떤 성격의 장르라고 특정하지 못한 채 임시방편으로 다큐멘터리나 비드라마, 코미디 버라이어티, 또는 퀴즈 및 시청자 참여쇼 등으로 구분하다보니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고료 문제는 작가-제작자간 협상테이블에서 늘 마찰을 일으키는 안건이었다. 제작사들은 '리얼리티 쇼'가 작가협회와 합의한 '최소기본협정'에는 없는 장르이기 때문에 협정에 명시된 작가들의 권리도 이 경우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그 결과, '리얼리티 쇼' 작가는 주당 평균 1,800 달러, 보조작가는 780 달러 내외를 받는 것으로 2015년 설문조사에서 드러났다. 드라마 대본료는 물론이고 다른 비드라마 고료와 비교해도 현격한 차이가 난다. 최저 고료 기준조차 지키지 않는 마당에 보험이나 연금, 기타 수익을 기대하는 건 더욱 어렵다.

협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작가들은 또 있다. 미국에도 우리처럼 대본을 쓰지 않고 섭외나 취재, 자료조사 같은 업무를 맡는 작가들이 있다. 이들 작가초년생들(entry level)을 '스태프 작가(staff writer)'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제작사나 방송사에 한시적으로 고용되어 주급을 받는다. 평균 임금은 연간 4만 달러 내외. 딱 미국 노동자의 평균임금 수준이다. 작가라는 크레딧도 달지 못하고 때로는 대본작업에 참여해도 정해진 임금 외에 따로 고료를 못 받기도 하지만, 고참 작가나 프로듀서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검증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보 작가들이 고달픈 입문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미국의 '협회 밖' 작가들이 우리 신입작가들처럼 살인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처해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고용과 동시에 수십 장짜리 노동계약서가 주어지고 자신이 해야 할 업무와 노동 시간, 책임과 권리를 세세하게 읽고 사인할 기회가 있다. 계약서나 사전 동의 없는 업무 지시가 있을 때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인종차별 혹은 성차별적인 부당행위를 당하면 법적 소송으로 정신적, 경제적 보상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그로 인한 고용상 불이익은 받지 않는다. 무엇보다 명백한 사실은 합의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피디가 하던 일, 조연출이 하던 일, 메인작가가 담당하던 일이 은근슬쩍 가장 힘없는 막내 작가에게 모두 전가되어 '을 중의 을'로 고통 받는 일은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계약 위반으로 제소하면 되고, 오히려 부당행위를 감수하는 사람이 바보 취급 받는 분위기이다. 비록 협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상식적인 선에서 노동권의 보호를 받는다.

한국의 방송작가협회가 힘없는 신참 작가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자유계약'에 의해 업무를 수행하고 자신이 창출한 '지적재산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수입을 얻는 작가들은 고료의 많고 적음을 떠나 기본적으로 약자이다. 지난 40여 년간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이나마 성장한 것은 이름난 작가들이 거대 방송사와 맞서 전체 작가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희생한 덕분이었다. 1998년에 결성된 협회 산하의 '구성작가협의회'는 비록 지상파 방송4사의 시사교양프로그램 작가들에 한정된 모임이긴 하나, 협회 소속이 아닌 서브작가, 취재작가들의 목소리를 꾸준히 반영해왔다. 늘어만 가는 업무량을 조정하기 위해서 '방송작가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설문조사도 실시했다. 그렇지만 피디나 기자들처럼 정규직도 아니고, 사회적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은 '직능단체' 이자 정부의 허가를 받는 '저작권 신탁 단체'인 작가협회의 구조적 한계 상 갈수록 열악해지는 신참 작가들의 노동 환경에 대처하기가 역부족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방송구성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던 20년 전부터 한국의 공영방송 시스템은 급속히 상업화, 외주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돈 안 되고 인기 없는 다큐나 시사정보 프로그램들이 축소되면서 제작비는 줄어들고 협찬 비중은 그만큼 커졌다. 1996년 노동법 개악에 이은 1997년 'IMF 환란'의 후과로 방송 제작진은 비정규직, 파견직 또는 외주 인력으로 채워졌고 인건비는 장르의 인기와 지명도에 따라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80만원으로 시작하는 시사교양프로그램 신입 작가의 한 달 급여는 2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그때는 식비나 야간 교통비라도 받았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다.

단순히 일이 많고 힘들어서 방송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방송업계로 뛰어드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부당한 업무 지시, 역할의 충돌과 갈등,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과로가 반복된다면 직업에 대한 열정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2012년 최현주 교수가 발표한 「방송작가의 직업만족도 결정요인 연구」라는 논문에 따르면, 책임이나 권한은 적은 반면 일은 가장 많고 보수가 적은 종합구성프로그램 작가들, 그 중에서도 경력이 적은 서브작가들의 업무 만족도가 가장 낮다고 한다. 자신이 왜 그 일을 떠맡아야 하는지 동의할 수도 없고 밤을 새워 일하는데도 받는 돈은 적고 미래까지 암담하다면 누가 그 일을 하려 할까? 차라리 방송작가의 꿈을 접고 '저녁이 있는 삶'이라도 갖겠다며 공무원이나 교사를 준비하는 제자들을 말릴 도리가 없다는 한 콘텐츠학과 교수의 한탄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방송은 사람이 만든다. 다른 모든 문화콘텐츠와 마찬가지로 방송은 사람만이 그 가치를 생산한다. '사람값'이 낮을수록 콘텐츠의 질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노동유연성이 급격하게 확대된 한국 방송산업 구조에서 비정규직, 프리랜서의 고충을 외면한 채 질 높은 프로그램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방송 인력들의 노동의 질을 개선하고 민주적인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곧 부가가치 높은 콘텐츠, 선진적인 방송산업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지금이라도 언론노조가 작가들의 노조 결성을 지원하고 이들의 업무 환경 개선과 권익 보호에 나선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방송작가협회도 직능단체로서 신참 작가들의 노조 설립을 지지하고 협력을 아끼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방송이 내세우는 공익성의 첫 번째 덕목이라면, 방송제작 현장에서 가장 약자인 어린 작가들을 살피고 보호하는 일부터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23살 여성이 젊은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되고, 19살 비정규직 정비공이 안전장치 하나 없이 지하철에 치여 사망하는 이 참혹한 시절에, 여성으로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신입 방송작가들에게 작가노조가 최소한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비록 지금은 방송 현업을 떠났지만 지난 십 수 년간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배우고 익힌 경험과 지식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을 탐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듯이, 후배 작가들 또한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조만간 한국에서 작가노조가 성공적으로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마리아가 논문 말미에 적은 한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창조산업의 어떤 위계질서에 존재하든, 어떤 장르를 담당하든, 작가는 같은 미디어노동자로서 인간적 존엄과 존중을 받아야 한다."

[참고자료]

한국 방송작가의 구체적인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최현주 교수의 「방송작가의 집필환경 현황 및 해외사례」(2014년 12월 12일,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 『방송작가 표준집필계약서 도입을 위한 토론회』 발제문)에 따르면, 전체 방송작가의 규모는 대략 1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송작가는 장르에 따라서 크게 드라마, 라디오, 구성·다큐, 예능, 번역 작가로 나뉘고 그 중 가장 많은 구성작가의 경우에는 경력에 따라서 메인작가, 서브작가(보조작가), 막내작가(취재작가, 자료조사원)으로 나뉜다.

방송작가들의 대다수는 급여에서 사업소득세 3.3%를 공제하는 인적 용역사업자 형태(일명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데(한국전파진흥협회가 2016년 2월 미래창조과학부 방송통신발전기금 융합활성화 정책연구결과로 제출한 「방송 산업 활성화를 위한 프리랜서 방송인력 실태조사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작가의 경우, '사업자 등록증 없는 프리랜서' 비율이 무려 85.5%에 달한다고 한다), 이마저도 대다수가 '구두계약'이나 '특별한 계약형식 없이 참여' 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서(위 보고서에 의하면 69.5%) 급여의 지연 지급 또는 체불(최근 1년간 경험 비율 43.7%)이나 방송제작 취소 시 대가를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받지 못한 적이 더 많거나 모두 받지 못한 비율이 78.8%)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위 보고서에 의하면 방송제작시 1주당 평균 노동일수가 6일 이상인 비율이 63.2%, 1일 평균 노동시간이 9시간 이상인 비율이 78.5%나 될 정도로 높았고 4대 보험 중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미가입 비율 역시 각각 89.6%, 88.9%나 되어 사회안전망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작가의 수입은 결코 많은 편이 아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016년 3월에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에 의하면, 설문에 응답한 구성작가 641명의 월 평균 수입은 메인작가가 282만 3,077원, 서브작가가 208만 7,973원, 막내작가가 120만 6,259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막내작가의 경우 1년 열 두 달 내내 일을 한다고 쳐도 연 수입이 약 1,450만 원(현재 환율로 약 1만 2,200달러)에 불과한 셈이다. 시간당 급여로 계산하면, 메인작가는 11,106원, 서브작가는 6,801원, 막내작가는 3,880원에 불과해 막내작가의 경우에는 현재 시간당 최저임금의 2/3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일하는 셈이다.

방송작가의 업무환경이 매우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기 때문에 방송작가들은 언론노조 산하에 '방송작가지부(준)'를 만들어 스스로 미디어 노동자로서 인간적 존엄과 존중을 받고자 한다. 현재 방송작가지부(준)에는 약 60명의 현직 방송작가들이 가입원서를 제출한 상황이며, 방송작가들은 노조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는 대로 △ 직종별/경력별 실정에 맞는 표준계약서 마련 및 의무화 △ 4대 보험 적용 등의 법제도개선을 추진하고 △ 급여(원고료) 체불과 성희롱, 인권침해 신고센터 운영을 통해 방송업계의 뿌리 깊은 잘못된 관행들을 공론화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 방송작가들의 든든한 벗이 되어 줄 예정이다.

▶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준) 가입 및 문의
온라인 카페 cafe.naver.com/mediawriterunion
문의 전화 1670-7286

[카드뉴스] 막내작가를 아시나요? (이미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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