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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아닌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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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좀 해봤다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이 정도 나이에, 이 정도 연차되면 친구보다 지인이 더 많아진다고. 그 말을 할 때면 하나같이 쓸쓸한 표정을 숨기질 못했는데, 요즘의 내가 꼭 그렇다. 아직 한참 남은 줄 알았던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친구라고 소개하기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고, 모른다고 하기엔 또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매해 부지런히 늘어난다. 대신 친구의 수는 자꾸 줄어드는 느낌이다.

"결국은 같은 업계의 지인들만 남게 돼있어. 다른 사람들이랑은 할 얘기가 별로 없거덩. 그래도, 너는 그러지 마라."

사회생활 2년 차에 접어들 무렵, 나보다 두 배쯤 연차가 높았던 선배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그 회사에 있던 일 년 동안, 선배는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 일만 했다. 시간이 생기더라도 같은 업계의 사람들을 만날 뿐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던 친구들과는 반년에 한 번 시간 맞추기도 어려웠고, 약속 자리에 아예 부르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어쩌다 시간이 생겨도 선뜻 가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침묵을 견뎌야 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걸 실감하게 될까 봐서였다.

그 말을 들은 그때, 나는 두려웠다. 가까운 미래에 나도 그렇게 될까 봐. 친구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는 게 없는, 하지만 모른다고 하기엔 어느 정도는 아는 지인들만 남게 될까 봐.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선배는 시간적인 부분에 있어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바빠도 부지런히 친구들을 만나라고 했다. 내가 다른 회사를 가게 되었다는 말을 어렵게 꺼냈을 때에도, 선배가 마지막으로 한 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만 하지 말라고. 친구 다 떠나고 후회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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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지났다. 불쑥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 달까지만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아직 계획은 없어. 일단, 친구가 하는 가게에 가보려고. 정말 친한 친구인데, 맨날 팔아준다 팔아준다 말만 하고 지키질 못했어. 그래도 그놈이 자주 전화해준 덕에 이 정도 관계 유지한 거지. 아님 그저 그런 지인으로 남게 되었을 걸."

미래에 대해 어떤 것도 정해진 게 없었지만, 선배는 그다지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일을 되짚어보며 갚아야 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는 것 같았다. 조금의 여유도 없었던 그때, 자신보다 몇 배는 더 큰 애정을 보내주었던 사람들에게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것 같았다. 내가 크게 노력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별 탈 없이 유지되는 관계가 있다면 상대방이 그만큼의 노력을 더 해주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전보다 줄어든 것 같은 요즘, 나도 그런 사람들을 자주 떠올린다. 행여나 멀어질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기꺼이 먼저 다가와준 사람들 말이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