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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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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년을 만나다 01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무 살 무렵에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다. 이 이상하고 긴 제목의 첫 어절이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조제는 걷지 못한다. 그의 할머니는 걷지 못하는 그녀를 가끔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 마실을 나간다. 그런 어느 날, 얄궂게도 유모차가 언덕배기에서 넘어지면서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게 된다. 도박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 평범한 남자는 조제와 사랑에 빠진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 영화 제목의 두 번째 어절, '호랑이'는 조제에겐 사랑에 관한 단어다. 츠네오를 사랑하게 됐을 때 조제는 츠네오에게 말한다. 호랑이를 보러 가자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 조제는 호랑이 우리 앞에서 츠네오의 팔에 꼬옥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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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들.

사랑은 사그러들고. 츠네오와 조제의 마지막 여행에서 둘은 파란 바다 속처럼 만들어둔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조개 모양의 침대. 엎드려서 잠든 츠네오를 옆에 두고 조제는 방의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엔 바다속 분위기를 내는 물고기 조명이 흐른다. 조제는 츠네오가 자신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안다. 조제는 혼잣말로 이야기한다.

"네가 떠나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파도에 휩쓸려 데굴데굴 이리저리 떠돌겠지. 그래... 하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아."

"내가 살던 곳은 아주 깊은 바닷속이었어. 아주 깜깜하고 고요하지. 그 깊은 바닷속을 나온 건... 너랑 세상에서 제일 야한 섹스를 하기 위해서야."

나는 조제의 섹스를 기억한다. 아주 깜깜하고 고요한 깊은 바다 속에서 나온 그 한 순간. 그리고 길 잃은 조개껍데기가 되어 다시 심연을 일상처럼 헤매는 것. 나의 첫 섹스는 조제와 츠네오의 섹스를 닮았다.

조제와 츠네오의 섹스

나의 첫 섹스 상대는 같은 학원의 남자아이였다. 학원의 교실은 내겐 바둑판처럼 지겨웠다.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흰 돌, 같은 검은 돌. 종이 울리면 다들 구부정하게 칠판과 필기노트를 번갈아보고, 다시 종이 울리면 엎드려 잠이 들었다. 그 아이는 항상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졸음을 깨려고 교실 뒤에 가서 서 있었다. 그때 그 애를 눈여겨보게 됐다.

'톡,톡'. 샤프심을 넣었다.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고 그 애는 수업 내용과는 영 딴 내용을 굉장히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모두가 칠판을 향해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린 것과는 반대로 그 애는 다리를 뻗대고 먼 곳의 풍경이라도 바라보듯 상체를 뒤로 젖히고 앉았다. 선생님이 농담을 하는 중에도 심각하게 근현대사 책에 밑줄을 그었다. 수업이 다 끝나도 혼자만 별세계에 있는 양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대체 그런 모습의 어디에서 그 애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지 지금도 모를 일이지만, 그 모습만이 그 곳에서 지겹지 않은 유일한 풍경이었다.

키스를 했다. 사는 아파트가 굴다리 하나를 건너에 두고 붙어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놀이터가 있었다. 벤치에 앉은 그 애는 나를 제 무릎에 앉히고 꼬무락대더니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나는 키스가 혀를 섞는 것인줄은 알았다. 아는 언니가 학교 계단에서 1시간 동안 키스를 한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키스하면 침 흘려." 언니는 침이 많이 흐르고, 조금 냄새가 나고, 물컹물컹하고 따뜻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나는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하면서 언니의 말을 떠올렸다. '침은 안 흐르네.'

그 후로 그 애는 시도 때도 없이 키스를 했다. 굴다리를 건너다가도 키스를 시도하고, 산책로를 걷다가도, 학원을 나오다가도, 비상구에서도 키스를 했다. '잠깐! 지금은 키스타임이야!'라는 신호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 싶었다. 그 애는 어디선가 '빠르게', '어디서나', '강제로' 키스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워온 모양이었다. 그덕에 나는 자주 입술이 텄다. 그 애는 주로 나를 무릎에 앉히거나 벽에 밀어두고 키스하는 걸 좋아했는데, 애타는 손길로 내 허리를 쓸어올렸다. 옷이 말려올라가면서 차가운 학원 복도의 벽에 등이 닿았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목덜미엔 따뜻한 숨이, 등 뒤엔 차가운 벽이. 가슴 위론 뜨거운 손이 단풍잎처럼 찍혔다.

나는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내 몸을 원한다는 것에 금세 도취되었다. 그 애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 도취해 있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면 더 심하게 목에 얼굴을 묻었고, 치마를 들추고, 속옷을 벗겼다. 나는 '보여지는 나'에만 집중했다. 누군가의 갈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느껴본 적 없는 원초적 즐거움이었다. 불편하거나 싫은 마음이 드는 날에도 보통은 그 어떤 요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그 애를 거절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 '거절'을 일종의 조련용 도구로 쓰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나는 '인형의 권력'이라고 이야기한다. 주체적으로 섹스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지만, 나는 사랑 받는 '인형'으로서 그 애를 좌지우지 했다. 성(sex)에 관한 것을 제외한 모든 감정싸움에서. 내 성을 무기로 누군가를 노예처럼 부리고 내가 또 한편으로 노예가 되는 것. "오늘은 싫어"라고 말하면 그 애는 "너무나 너를 원한다"고 말하는 떼쟁이가 되었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기쁨.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소유'하려 들기 시작하면 이런 기쁨을 갈망하게 된다.

깜깜하고 고요한 바다

수능이 끝나고, 그 애와 내가 스무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그 애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때마다 나는 그 집을 찾아갔다. 어머니가 안 계신지 오래였고, 아버지는 살림을 하지 않았다. 도마와 칼, 뒤집개 같은 것을 대충 봐도 사람 손길이 안 닿는 부엌이구나, 알 수 있었다. 나는 뒤집개를 깨끗이 씻고 그 애에게 밥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날 잤다. 거실 겸 안방에 놓인 매트리스에 그 애가 나를 눕혔다. 정성껏 물고 빨고 핥았다. 나는 그 애의 넉넉한 맨투맨티 하나에 속옷만 입고 있었다. 그 애는 내 팬티를 다 벗기지도 앉고 발목에 걸쳐두었다. 그 애가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첫 번째는 찢어지듯 아팠고 두번째는 조금 좋았고 세번째부터는 내가 허리를 움직였다.

그 날은 그 애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다. 우리는 성공적인 첫 섹스를 마치고 누워 서로 살냄새를 맡았다. 뜻밖에도 그 애는 그날 밤 두 번을 울었다. 첫째는 기뻐서. 둘째는 꿈을 꿔서. 그 애는 자기의 동정이 사랑하는 '너'와 함께라서 너무 기쁘다고 울었다.

잠이 들었다가 그 애의 우는 소리에 깼다. 그 애가 엄마를 부르면서 울고 있었다. 꿈결인 게 분명했다. 나는 얼결에 그 애를 안고 토닥였다. 어둠 속에서 그 애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내게로 기대왔다. 작은 조개처럼. 나는 등을 꼬옥 안아주었다. 더러운 부엌과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 혼자 정돈해둔 옷가지들. 습관처럼 켜놓던 TV.

그때는 눈치 채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설프고 따뜻한 밥상, 깊은 바닷속처럼 어두운 새벽에 손 뻗으면 닿는 온기. 나에게서 그 애는 그런 것들을 받은 것이다. 그게 그 애를 울렸다. 그 애는 우는 대신 섹스를 했다. 울다 깨서 다시 나를 핥았다. 그 애에게 나는 간절한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 애가 있었던 '깜깜하고 고요한 바다'를 엿봤다. 그 애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던 어느 심해. 우리는 바다 속을 나와 다시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했다.

나는 간절하게 그 애를 위로하는 '도구'로 쓰이고 싶었다. 도구가 되어도 상관 없었다. 그리고 그 애에게 딱히 해줄 게 없어졌을 때 그 애를 버렸다. 겨울이 다 지나기 전의 일이었다.


모든 일은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그때 일어납니다. 몇 가지 진실과, 몇 가지의 거짓으로 써 내려가겠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기록. <소녀,소년을 만나다>는 시리즈로 연재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블로그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