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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빈의 교훈 | 진짜 도덕적 다수가 좌파라면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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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CORBYN
Chris J Ratcliffe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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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지난 6월 초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거둔 예상 밖의 성공은 냉소적 지혜 일색이던 품평가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총선에서 영국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에게는 동조한다면서도, "그래, 난 코빈에게 투표할 거야. 하지만 선거에서 당선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지. 여론 조작이 심하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아직은 그렇게 급진적인 조처를 취하기엔 시기상조니까..." 하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곤 했던 이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코빈 대표 체제에서 노동당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소수화해서 집권 가능성을 잃고 말았다는 전 총리 토니 블레어의 주장을 돌이켜 보라.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객관적 상황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통찰로 위장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다.

물론 끈질기게 지속되는 문제와 의구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코빈의 강령이 지닌 한계를 따져봐야 한다. 과거의 복지국가를 넘어서는 수준인가? (그가 대표하는) 노동당 정부는 전지구적 자본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 질문을 주저하지 말고 던져야 한다. 선거 승리라는 게 여전히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핵심 기제일까? 우리는 선거 과정이 갈수록 얼토당토않게 바뀌는 것을 목격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실제의 결과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노동당의 (상대적) 성공이 지닌 더 깊은 의미라 하겠다. 이번의 성공은 주요한 윤리적·정치적 변화를 보여준다. 우리의 정치 언설이 조악해지는 현상에 대한 강력한 반대 움직임 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헤겔이 말한 '윤리성'(Sittlichkeit)이다. 그러니까 예의범절, (글로 규정되지 않은) 사회적 삶의 규칙들의 두터운 바탕,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려주는 두텁고 침범할 수 없는 윤리적 골자 말이다. 오늘날 이런 규칙들은 와해되고 있다. 이삼십년 전만 해도 공적인 토론 석상에서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말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발설한다. 트럼프는 부인인 멜라니아의 허풍에 맞장구치면서 더 많은 고문을 사용하겠노라 다짐하고,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유럽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유대인들이 난민 유입을 기획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그런데 훨씬 더 시급한 "진짜"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는 오늘날, 어째서 공손함과 공적 예의에 관해 말하는 것인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단순한 예술로서의 살인에 관한 영국 작가 토머스 드퀸시의 이런 유명한 빈정거림 수준으로 퇴행하는 것은 아니다. "공포와 경제적 재앙을 풀어놓는 것으로 시작해 파티에서 고약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끝낸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예의범절은 정말로 중요하다. 긴박한 상황에서는 그것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가느다란 선이 되기도 한다. 과거 1960년대에는 상스러움이 종종 정치적 좌파와 결부되곤 했다. 학생 혁명가들은 공적 정치의 세련된 전문어에 맞선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강조하느라 일상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오늘날 상스러운 말은 거의 전적으로 극우파들의 특전과도 같아서, 좌파는 놀랍게도 점잖음과 공적 예의범절의 수호자라는 위치에 놓이곤 한다.

불행히도 좌파 자유주의의 공적 영역 또한 갈수록 트위터 문화의 규칙들에 지배되고 있다. 짧은 글, 톡 쏘는 대꾸, 냉소적이거나 화난 논평이 지배적일 뿐 다단계의 논지 전개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글의 한 대목(한 문장 또는 문장의 일부)을 잘라내서는 그에 대응하는 식이다. 이런 트위터식 대응을 지탱하는 입장은 자기 정당성과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잔인한 냉소주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문제적인 발언이 감지되는 순간 자동적으로 그에 대한 대꾸가 발사되는데, 그것은 대체로는 상식적 수준의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대응이다.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규범(이성애라는 강제된 규범 등등)을 얼마나 거부하는지 강조하길 즐기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도그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에 대해 "트랜스포비아"(트랜스젠더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니 "파시즘"이니 하는 식으로 비난하는 그들의 입장이야말로 가차 없는 규범에 다름 아니다. 공적 관용과 개방성이 실제로 다른 견해들에 대해 취하는 극도의 불관용과 결합한 이러한 트위터 문화는 비판적 사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도널드 트럼프 식의 맹목적인 포퓰리즘적 분노의 그야말로 거울 이미지이며, 동시에 특히 오늘날 유럽에서 우파 포퓰리즘에 대한 좌파의 대응이 비효율적인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누군가 이런 포퓰리즘이 피착취자들의 대중적 불만에서 그 동력의 상당 부분을 끌어온다고 언급하기만 하면 그는 즉각 "계급 본질주의"라는 공격에 직면하게 되는 식이다.

우리는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보수당과 노동당의 선거 유세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보수당의 선거 유세는 영국의 정치적 전투에서 새로운 바닥을 보여주었다. 코빈을 지하드 성전의 전사라 공격하고 노동당은 반유대주의의 본산이라 공격함으로써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식이었는데, 이런 공세는 테리사 메이 총리가 웃는 얼굴로 인권을 말살하겠노라 약속하는 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것은 물론 공포의 정치였다. 거기에 정치란 게 있다면 말이다. 영국독립당(UKIP)이 존재감을 잃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당이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메이와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이 영국독립당이 할 일을 가로채 버린 것이다.

코빈은 이런 더러운 게임에 연루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오로지 거침없고 솔직한 태도로, 경제에 관한 우려에서부터 테러 위협까지 보통사람들의 관심사와 핵심 의제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 분명한 대응책을 제시했다. 그의 연설에는 분노나 원한, 값싼 포퓰리즘적 선동이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자기 정당성 또한 없었다. 다만 보통사람들의 실제 관심사에 대해 보통의 품위를 지닌 채 얘기했을 따름이었다. 이런 접근법이 우리 정치 공간에서 발생한 주요한 변화로 꼽힌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슬픈 표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때로는 저 옛사람 헤겔의 주장을 새롭게 확인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온갖 전략 중에서도 순진무구한 솔직함이 가장 파괴력 있고 지혜로운 전략일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번역 | 최재봉 (한겨레 선임기자)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