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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4인 스코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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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기 동반성장국가혁신포럼 기획위원

최근 유명한 역사 강사인 설민석 씨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폄훼 논란이 화제이다.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대부분이 변절했거나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그의 발언에 33인의 후손들은 분노하며 설민석 강사를 법원에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예정이다.

나는 설민석의 주장에 상당한 과장이 있고 부적절한 표현이 있지만 일정 부분 수긍한다. 생각해보면 33인 중에 해방이 될 때까지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몇 분이나 될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변절에서 보듯이 많은 지도자들이 변절했거나 소극적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런데 이 논란을 보면서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석호필이라는 한국명을 가진 스콜필드 선교사이다. 그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인으로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수의학자가 된 분이다.

스코필드는 1916년 기독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와서 세브란스의전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런 중에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과 3.1 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을 하게 된다. 3월 1일에 그는 카메라를 들고 파고다 공원, 덕수궁, 종로를 오가며 사진을 찍어 서방세계에 보낸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3.1 운동 사진의 대부분이 스코필드 선교사가 찍은 것이다.

특히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에서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수원에서 화성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 참혹한 학살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그는 또 옥에 갇힌 독립 운동가들을 돌보며 방대한 3.1 운동 보고서를 만들어 일제의 만행과 만세운동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기록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그를, 일제는 1920년에 캐나다로 추방해버린다.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도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대한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1956년 해방된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그는 고아원을 세워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주는 등 다양한 사역을 펼치며 반부패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런 공로를 인정하여 국가는 그에게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건국훈장을 주었다.

1970년 4월 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81세의 나이로 영면한 그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스콜필드 선교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정운찬 전 총리의 증언에 의하면 말년에 그는 늘 3가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첫째, 정직하여라.
둘째, 나라의 힘을 키워라.
셋째,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 해소에 힘써라.

우리보다 더 진실한 한국인 석호필,
우리보다 더 우리를 사랑했던 스코필드 선교사,
그의 일관된 삶과 말씀이 더욱 그리워지는 3월이다.

글 | 김상기

익산희망정치시민연합 대표/ 동반성장국가혁신포럼 기획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