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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생색 내기'가 아닌 '실질적 참여'를 보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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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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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직후인 5월 19일 5당 원내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내년 6월 13일 지방선거 때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와 함께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권의 개헌 논의 과정에 국민의 의견을 충실히 수렴하여 반영하고 선거제도 개편도 함께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 이후 국회에서는 개헌특위 연장과 정치개혁특위 구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국회 개헌특위에서는 지난 7월 14일 보도자료를 내고, 국민과 함께하는 개헌논의 일정을 공개했다. 그 내용을 보면, 국회방송을 통해 국가원로 및 각계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방송토론을 하고, 11차례에 걸쳐서 지역순회 토론회를 하며, 국회 안팎에 개헌 자유발언대를 설치하며, 일반 국민들 중에서 세대·지역·성별을 아우르는 개헌국민대표 5000명을 선발하여 원탁토론을 4차례 하겠다는 것이다. 그 외에 온라인으로 의견을 내고 토론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개설하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언뜻 보면 이전보다는 진일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막연한 방안이다. 지역 순회토론이든 원탁토론이든, 토론내용을 어떻게 반영하겠다는 것인지가 없다. 5000명을 선발한다는 개헌국민대표도 도대체 어떻게 '선발'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공모를 하겠다는 얘기도 있는데, 공모는 자칫 '동원'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추첨제 시민의회 도입이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형식적인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효성 있게 설계된 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의견을 수렴하는 모양새만 밟겠다는 것일 뿐이다. 이런 식의 형식적인 국민참여 방안으로는 개헌안에 대한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번 개헌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거치면서 추진되는 개헌이다. 따라서 개헌의 과정부터가 달라야 한다.

이번 개헌의 과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정신을 실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원했던 것도 바로 헌법 제1조가 실현되는 민주공화국이었다. 이런 개헌이 되기 위해서는 추첨제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와 같은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이미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같은 국가들이 개헌 과정에서 이같은 시민참여 방식을 도입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온타리오주에서는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해서도 시민의회를 운영한 경험이 있다. 지금도 아일랜드에서는 무작위로 추출된 99명의 시민들이 헌법개정안에 관한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추첨제라는 방식이 다소 낯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추첨제는 민주주의를 혁신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으로 인정받고 있다. 추첨제의 장점은 대표성을 고르게 확보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참여의 기회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성별, 지역별, 연령별로 고르게 샘플을 추출해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작위로 시민들을 뽑아내고, 그 시민들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학습하고 토론하면 된다.

대한민국에서도 추첨제는 완전히 낯선 방식은 아니다. 이미 국민참여재판에서는 배심원을 뽑을 때 추첨제를 활용하고 있다. 형사재판에서 유·무죄에 대한 판단을 시민배심원들이 하고 있으며,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평가결과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렇다면 헌법개정과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추첨제로 뽑힌 시민들이 토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시민주권이 실현되는 최초의 개헌으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 개헌은 최초로 시민들이 참여하는 개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시민참여의 과정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회의장 직속으로 (가칭) 개헌공론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공론화추진위원회는 국민들이 참여하는 절차를 설계하고, 공론화 과정 전체를 관리하며, 참여하는 시민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최근 문재인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도 참고할 수 있는 사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공론화 과정에서 시민참여의 핵심적인 방식으로 '추첨제 시민의회'와 같은 숙의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지역순회토론, 온라인토론 등 다양한 참여방법을 활용해야 한다. 한정된 시간을 감안하면, 시민의회는 주요 쟁점별(권력구조 개편, 직접민주주의 확대, 지방분권, 기본권 확대, 선거제도 개혁, 사법개혁 등) 토론을 진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시민의회의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쟁점별 토론의 과정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참여 과정을 밟기에 시일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지를 갖고 최대한 집중해서 진행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30년 만에 추진되는 이번 개헌은 그 과정부터가 시민주권을 실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