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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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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R GLASSES
Henrik Sorensen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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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자리를 좋아한다.

밴드 '플라마'의 보컬이라는 최소한의 책임감으로 설정한 공연 전 3개월여의 금주기간이 공연 뒷풀이와 함께 시원하게 끝난 요즘 그간 미뤄두었던 초대와 약속들을 수행하느라 나의 간은 거의 매일 시간외 근무중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건 술 자체라기보다는 그 자리에서만 가능한 편안한 이야기들과 조금은 풀어진 분위기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되도록 천천히 긴 시간 잔을 나누는 그런 류의 자리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간 몰랐던 술의 향과 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스무살 무렵 나를 기억하던 친구들이 본다면 나이 먹어서 그렇다는 핀잔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대학 새내기 시절 그리고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던 그 때도 내 술자리는 매우 많은 시간을 긴장과 경쟁의 시간으로 보내왔던 것 같다.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착실히 잔을 비워야만 했던 그때의 시간들 속에서 내 주량이 친구들보다 조금 센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느 날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주량경쟁의 무대로 착각하게 된 것 같다.

남자는 원샷! 소주병은 홀수! 안주는 한 잔 당 한 젓가락! 말도 안되는 규칙들을 외쳐가며 술값이 안주값을 이겼음을 자랑스러워 하던 유치한 그때의 술자리는 누군가가 스스로 귀가할 수 없는 명확한 사건이 발생하고나서야 끝이 나곤 했다.

물론 그때도 맘 깊은 고민 이야기도 애잔한 사랑 이야기도 뜨거운 우정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오늘은 누가 최후의 생존자인지 나의 주량은 몇 병의 소주로 신기록이 세워졌는지를 논하다 보면 소중한 밤들은 끊겨진 필름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기억의 세계로 봉인되어 버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조금 늦게 알게된 술자리의 의미 덕분에 요즘은 한 잔 한 잔에 담아내는 작은 이야기들이 조금은 더 짙게 다가오는 것 같다.

살다보면 나의 20대 술자리들처럼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열심히만 외치면서 달리는 경우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학생들 앞에 서 있는 교사였지만 아이들의 입장보다는 내가 만든 지도 안에 충실하려 했고 사람과의 사귐에서도 상대의 생각보다는 열심히 무언가를 주기만 하는 것이 최고의 예의이고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요즘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더 이상 열심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사는데 얻는 것도 재미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자격증도 학벌도 다양한 경험까지 가진 괜찮은 녀석들이 가지는 허탈함을 들으며 내가 해 줄 수 있는 한 마디는 왜 그것들을 해왔냐는 단순하지만 잔인한 물음이다.

의미를 상실한 열심은 지치는 순간 허탈함이 남을 뿐이다.

무작정 병 수를 세어 가며 마셔대던 그때의 내가 도달했던 '블랙 아웃'의 시간들처럼 의미 없는 전력질주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어느 순간 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한 잔을 소중히 여기는 잔잔한 시간들처럼 내가 가는 길의 경치를 음미하는 느릿한 발걸음처럼 내가 열심히 추구하는 의미와 방향을 깊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숨이 너무 차오르기 전에 심하게 취기가 오르기 전에 시원한 물 한 잔 마시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싸구려 소주 한 잔에 배어 있는 사람의 향기를 알게 되는 순간 당신은 어렴풋한 추억을 담아 낸 숙취마저 사랑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