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승준 Headshot

하고 싶은 일 하게 해 주세요

게시됨: 업데이트됨:
1
연합뉴스
인쇄

어릴 적부터 난 수학을 좋아했다. 실명을 하고 특수학교 입학을 한 후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하려고 하고 곧잘 하기도 했던 내게 선생님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 같다.

원래도 좋아하던 수학인 데다가 주변의 응원과 인정까지 더해지니 난 내 진로는 당연히 수학자라는 맘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수능을 앞두고 대학과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선생님들의 태도가 돌변하시기 시작했다.

특수교육과나 사회복지과를 권하시던 몇몇 선생님의 회유로부터 시작된 따뜻한 조언은 세상물정 모르는 고집쟁이라는 꾸중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이유는 단 하나 시각장애인은 수학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원서로 추천서로 그 밖에 이런저런 설득들이 이어졌지만 결국 고집쟁이는 수학 관련 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약간의 타협이라면 수학과 아닌 수학교육과라는 정도였지만 그 정도면 똥고집이란 소리를 듣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어찌어찌 대학전공까지는 의지대로 선택하기는 했는데 첫 강의시간 그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난 선생님들의 말씀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고 있었다.

변변한 점자교재는 당연히 없는 것이라 치더라도 교수님들 중 어떤 한 분도 시각장애인 학생 한 명을 위해 칠판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주시는 분은 없었다.

시간이 꽤나 흐른 뒤 수 차례의 부탁 후에 이어진 몇몇 교수님들의 배려가 있긴 했지만 친구들과 경쟁하기에 그것들은 그냥 약간의 위로가 될 정도일 뿐이었다.

스스로 자기 공부할 시간까지 쪼개어 헌신적으로 도와주던 동기녀석들과 선배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 4년을 채 버티지도 못하고 중도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수능 비슷한 점수를 받아들고 입학한 동기들에 비해 난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았겠지만 반대로 특별히 실력이 없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 좋게 점자교재가 준비되거나 교재 자체가 별 필요 없는 과목에서 나의 성적이 몇 번인가는 아주 훌륭했던 것을 보면 시각장애가 그다지 수학과 궁합이 맞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학교환경은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진 나에게 배우고 싶은 것을 마음껏 가르쳐줄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 운 좋게 만난 좋은 친구들, 정말 헌신적이었던 점역사 선생님들, 스스로의 노트를 꺼내주시던 몇 몇 교수님들과의 우연한 만남들이 때때마다 기적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다시 말하지만 내게 학사모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하늘이 도운 졸업 뒤에는 더욱 엄청난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범대 학생들 대부분이 도전하는 임용고사였지만 나에겐 도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공무원 신체검사 규정도 문제였지만 대학수학은 공인된 점자도 존재하지 않아서 점자로 점역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필은 국가고시에서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결국 내겐 시험장 출입은 허락되었지만 그 이상의 결과를 기대할 가능성이란 게 없었다.

지금은 임용고사에서도 장애인 쿼터가 있지만 수학만큼은 아직도 완벽한 점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시험을 보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또 다시 만난 벽들! 난 또 다른 좋은 인연들 또 다른 작은 기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위치에 있지는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난 정말 순간순간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교사를 하는 것도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노력과 능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시각장애인들에게 그런 운을 기대하며 도전하라고 권할 수는 없다.

며칠 전 제자들의 수능시험이 치러졌다.

진로를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난 어느 땐가의 선생님들처럼 안정적인 학과를 권해주고 있다.

10년도 넘고 20여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의 나 그리고 지금의 제자들이지만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은 그다지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한 권도 보기 힘들었던 수능형 참고서가 한두 권 정도 생겼다는 것, ebs 화면해설방송이 생겼다는 것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지만 그것 또한 대학입학까지를 도와줄 뿐이다.

가고 싶은 대학을 간다는 것 원하는 전공을 선택한다는 것 그것은 아직도 준비되지 않은 사회로 인해 우리 아이들에겐 무모한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은 삶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평생을 맡겨야 할지도 모르는 진로선택에서부터 장애를 고민하게 해야 하는 교사의 마음이 너무 아프다.

꼭 눈으로밖에 할 수 없는 몇몇 전공분야까지 억지를 부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설렘 속에 미래를 설계하는 선택의 즐거움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주어졌으면 좋겠다.

또 열심히 준비하고 능력을 갖추었을 때 장애와 상관 없이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스무살도 되지 않은 녀석들이 거친 선구자의 짐을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사된 마음으로 현실과 안정 따위로 아이들의 꿈을 꺾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도 아이들은 정말 오랫동안 준비한 실력을 하룻동안의 시험으로 모두 쏟아내었다.

아이들의 바람이 그들의 꿈이 맘껏 자라날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사회를 하루 속히 만들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