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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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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HEALTH
Shutterstock / Peshk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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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게 지내는 동생이 찾아왔다.

과도할 정도로 밝은 녀석인데 오늘만큼은 전우주의 우울한 기운을 모두 끌어모은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몇 잔의 소주가 목울대로 넘어간 뒤에서야 겨우 내뱉어진 그의 사연은 끝을 맞은 연애담과 그 상대에 대한 것들이었다.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대한 놀람, 상대에 대한 배신감과 그간 잘해 준 것에 대한 억울함,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대한 미련, 작은 잘못들에 대한 후회, 익숙함의 결여에 대한 허탈감...

아직 좋아하면서도 그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미워하면서도 혹여나 하는 가능성 때문에 시원하게 말하지도 못하는 매우 복잡한 감정선이었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냥 연인과 헤어진 어린 친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조금 늦은 나이에 찾아온 첫사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그에게 좀 더 아픔의 가중치를 주었을 수는 있었겠으나 한 동안 이어진 그의 열변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들 그래"였다.

덧붙여 이어지는 독설과도 같은 나의 이야기들은 다른 이들이 조심스레 덮어놓은 위로들마저 후벼내고 있었다.

"너의 장애가 그닥 매력적인 소재는 아니잖아. 그 정도면 오래 견딘 거지.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모를 수도 있지만 현실이 보이게 되는 순간 그 정도 배신은 우리에겐 흔한 일이기도 하고 어쩌면 배신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현명한 반응일지도 몰라!"

"장애마저 사랑해줄 수는 없냐는 로맨틱한 억울함은 단지 로망으로 끝날 가능성이 훨씬 높고 사지 멀쩡하고 더 멋지기까지한 다른 수컷들과의 경쟁에서 몇 번의 시련 정도는 우리에겐 당연한 관문이지."

"장애가 현실사회에서 어떤 대접으로 다가오는지 숱하게 겪었으면서 사랑만큼은 다를 거라고 생각한 게 우습지 않아? 또 다른 처음이라 그런 거야. 연애도 결혼도 현실인데 하루하루가 전쟁인 우리에게 이런 것 따위로 억울해하고 상처로 느끼는 건 사치일 뿐이야 얼른 털어버리고 새 사람 찾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내 화법인데도 처음 겪는 시련인지라 녀석은 조금은 당황하기도 하고 조금은 섭섭해 하는 것도 같았지만 이내 뛰어난 현실감각으로 원래의 냉철한 판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살다 보면 늘 새로운 도전과 마주하게 되고 그때마다 벽도 만나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늘 내가 가장 힘든 것 같고 그때마다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대부분의 것들은 누구나 겪는 그렇고 그런 것들이고 과거가 되어버리는 순간 자연적으로 무뎌지고 담담해지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아프고 힘든 경험들을 얼마나 내 재산으로 만들어 가는가의 싸움인 것 같다.

녀석에겐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건 먼저 아팠던 내 기억들의 힘이었을 것이다.

이상한 사람들 더 많은 억울한 상황들마저 그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나는 오늘도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닥 많지도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연애경험은 오늘 그 녀석을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가게 하는 큰 힘을 발휘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아직 결혼은커녕 연애어른도 아니다.

어쩌면 그 녀석에게 한 말은 나를 향한 내 채찍질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 녀석에게 거꾸로 연애상담을 받는 날이 오기 전에 얼른 진짜 어른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