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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이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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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에는 애국조회라는 것이 있었다.

이제 갓 학생이란 이름표를 달게 된 1학년 꼬맹이부터 나름 세상을 안다는 헛바람이 들기 시작한 6학년까지 전교생 누구도 예외 없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운동장에 도열하여 고문 아닌 고문을 받아야 했다.

애국가나 교가를 부르는 정도의 의미는 나름 짐작이 되긴 했지만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지금 되돌아봐도 우리에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로 공산당이 어쩌고 간첩이 어쩌고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고 교장선생님 개인의 업적에 대한 내용도 몇 줄씩은 꼭 들어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확실한 건 우리 중 거의 누구도 그런 반복되는 일정들과 말씀들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고 최고 큰 박수가 나오는 시간 또한 끝나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결혼 시즌인 5월의 주말들을 거의 대부분 예식장에서 보내고 있는 요즘 하객들의 모습들이 그때의 친구들과 별 다를 것 없다는 생각들이 들곤 한다.

누가 처음 정해놓은지 모르는 대략의 순서들은 특별히 다르지 않은 연주들과 함께 반복 재생된다.

가끔 입담 좋은 몇몇 주례선생님을 제외하면 그 시간은 언제나 길고 집중하기 힘들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또 한 번의 과정이 되고 어릴 적 교장선생님을 바라볼 때와 비슷한 감정선을 끄집어낸다.

정작 주인공인 신랑신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스치듯 인사를 나눠야 하고 축의금 접수대나 사진 찍을 때가 아니면 식장보다 식당이 더 붐비는 걸 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결혼식을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 드디어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할 수 있는 온전히 축하할 수 있는 결혼식을 보게 되었다.

'비보이의 결혼식' 그건 시작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장모님과 친구들이 모여 만든 합창단의 축하무대 그것이 그날의 오프닝 무대였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각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달란트로 그날의 주인공들을 축하하는 무대를 열어주고 있었다.

어떤 이는 프로다운 노래와 춤을 보여주기도 했고 어떤 이는 손수 적은 편지와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잘 하고 못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진심을 담아서 축하해 주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웠던 건 신랑신부의 등장이었는데 둘은 누가봐도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한 번에 알려주고 싶은 것 같았다.

덤블링 그리고 가볍지만 예사롭지 않은 몸짓들. 둘은 그들만의 사랑의 언어로 달려와서 깊은 포옹으로 등장을 마무리했다.

등장음악 또한 늘 듣던 것이 아닌 힙합! 사회자의 자리엔 늘 보던 점잖은 친구가 아니라 멋진 DJ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약속의 시간에 환호와 축하를 보내주었고 신랑신부는 다양한 퍼포먼스로 끝없는 사랑의 다짐을 보여주었다.

긴 주례사가 아니어도 우리는 둘의 만남과 그들만의 사랑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고 두 명의 주인공은 식사라는 강력한 경쟁자와의 경쟁을 이겨내고 온전히 축복과 응원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아직 결혼이란 걸 해 보지 못해서 그 숭고한 의식들의 의미를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한 의식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도 의미를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서로에 대한 사랑의 맹세, 부모님과 하객들에 대한 감사, 열렬한 응원과 환호의 축복들 그것조차 뒤로 밀어놓을 정도의 중요한 것은 결혼식에서는 없다고 확신한다.

기적적인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의 성스러운 출발점이 허례허식을 만들고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모두가 힘들고 지치는 날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 다른 사랑들, 다른 과정들로 만난 둘만의 색다른 결혼식! 앞으로도 두 사람만의 색다른 축복을 받는 진짜 결혼식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