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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그러나 모든 것일 수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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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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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 등 뒤의 브라 후크를 잡아당겨 풀거나, 뒤에서 껴안아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는 '장난'을 쳤다. 당시 그런 행동은 일부 짓궂은 아이들이 그저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감정을 서툴게 표현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속상해 하며 어른들에게 이야기하면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런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말을 듣다 보니 그때는 화를 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2.

중학교 1학년 때, 오전 8시 반 경 등교를 위해 집 근처 대로변을 지나고 있었다. 근처에 세워진 차량 한 대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무심결에 돌아보니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하의를 벗고 있었다. 너무 놀라 비명도 못 지르고 고개를 돌린 채 그대로 등교했으나 며칠간 그때 봤던 영상이 눈 앞에 아른거려 잠을 잘 수 없었다.


3.

고등학교는 여고였다. 대부분의 여고가 그렇듯이 우리 학교 앞에는 '아담'이라는 바바리맨이 출몰했다. 아담은 하의를 벗거나 바바리만을 입고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경찰에 연행되고는 했다. 그러나 곧 풀려나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학교 주변을 서성였다. 누군가 혼자 있다가 아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떠돌았다.


4.

대학교는 여대였다. 방학 때 오전 11시쯤 도서관에 가려고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 옆에 있던 덤불에서 갑자기 어떤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성기를 흔들며 내 앞에서 자위를 했다. 너무 놀라 항상 머리 속으로 연습해오던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얼굴을 돌리고 달아나버렸다.


5.

대학생 시절, 과외하던 아이가 압구정 한양아파트에 살았다. 과외를 하러 오후 1시쯤 압구정 대로를 걸어가는 길이었다. 그날은 비가 왔고 평소보다는 사람들이 적었고 다들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내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남자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지퍼를 열고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피할 길이 없어 그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남자 곁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6.

회사원이던 무렵의 어느 주말. 오후 4시경 지하철을 탔고 한적한 6호선이 그날 따라 앉을 자리는 없어 서서 가고 있었다. 술 취한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나에게 매우 근접하게 서더니 몸을 부비적대기 시작했다. 참다 못해 뭐하시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자 잠깐 주춤하는 듯했으나 곧 본인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다니 참을 수 없다고 다음역에서 내려 경찰서에 가 확인을 하자고 했다. 공포에 휩싸여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다음 역에 도착하자 그 아저씨는 사라지고 없었다.


7.

회식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새벽 1시 무렵이었고, 서둘러 잡아탄 차량은 창문 전체가 강하게 썬팅이 되어 있었다. 운전기사의 정보를 표시하는 기사 카드를 꼽아두는 칸은 비어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내가 '차에 썬팅을 많이 하셨네요?'라고 묻자 기사는 '네, 안이 들여다보이는 게 싫어서요.' 라고 말했다. 이어서 '근데 남자친구 있어요? 왜 이렇게 늦게 다녀요'라며 여러가지를 물어왔다. 마침 라디오에서는 택시 관련 범죄 뉴스가 나오고 있었으며 뭔가 이상한 느낌에 나는 떨기 시작했다. 충격적이게도 기사는 덜덜 떠는 나를 보고 재미있어 하며(?) 택시범죄가 나오는 방송의 볼륨을 키웠다. 다행히 무사히 집에까지 도착하였으나 잠깐 사이 내가 느꼈던 두려움과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도로에 뛰어내려야 하는가를 두고 심각히 고민하던 순간의 두려움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 외에도 비슷한 일화는 무수히 많으나 시간과 장소, 범행주체가 약간씩만 다를 뿐 결국 같은 이야기이기에 이만 그치기로 한다. 성희롱이나 성차별적인 요소를 제외하고(성희롱이나 성차별에 관한 일화는 차마 글로 다 쓸 수조차 없다.) '성범죄'의 성격을 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만을 구분하였는데도 기억나는 것만 20회가 넘는다. 시간과 장소를 명시한 까닭은 흔히들 성범죄의 환경이 되리라 생각하는 '으슥한 장소'나 '늦은 새벽시간'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당신이 항상 살고 있는 그런 일상.

나는 내가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해도 주변 여자친구들 누구도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그녀들 역시 이런 경우는 꽤 흔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주변 여자친구들은 바로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들이다.

너무도 흔하게 존재하여 이제는 농담의 소재로까지 등장하는 '바바리맨'. 만약 내가 바바리맨을 만났던 그 순간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어두운 저녁이었다면? 더욱 외진 곳이었다면? 그래도 나에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썬팅 된 택시를 몰던 운전기사는 무슨 목적으로 나를 놀린 것일까? 단순한 장난이었을까? 혹은 정말 범죄자였을까? 만약 실제로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성폭행과 살해 위협이 다가오는 그 순간에 과연 택시에서 뛰어내리는 게 가능했을까?

사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지금까지 있어왔던 여성대상 수많은 강력범죄, 이를테면 자동차 트렁크에 담겨 죽은 채 불에 태워지거나, 토막내진 채로 산에 유기되거나, 사체가 앞마당에 묻히거나 하는 엽기적인 범죄에 비하면 덜 충격적일 수도 있다. 이 사건으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이게 뭐 그리 무섭냐고 묻는 남자들이나 왜 남녀간 편가르기를 하냐는 사람들은 지금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이건 여자를 미워하던 정신병자가 저지른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다. 한국 여성들이 늘상 느껴왔던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이다. 그릇에 가득 차 있던 물에 한 방울이 더해졌고 이제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범인이 정말 정신병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범인은 범행 동기로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여성을 골라 죽이려고 했다'고 밝혔고, 이는 그가 여성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해준다.

많은 여성들이 이 사건이 '묻지마'가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명명되길 원하는 까닭은 그만큼 사회 전체가 이제까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몹시도 너그러웠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그만큼 흔해 빠졌으며, 여성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어릴 적 여자애들의 가슴을 만지는 남자애들의 행동을 두고 '다 널 좋아해서 그런거야'라는 무언의 동의가 있어왔던 데 대한 저항이다. 너무도 두렵고 공포스런 상황을 벗어나려는 생존의 본능. 그저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작은 소망.

어릴 때부터 아주 큰 사냥개를 기르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다. 도사견이나 도베르만, 셰퍼드처럼 큰 개를 몰고 늦은 시간에 골목길을 자유롭고 당당하게 거닐다가 추행을 시도하거나 수상한 위협을 가하는 이가 있으면 '물어'라고 앙칼지게 외치고 싶다고 말했다.

도사견이 사람을 물어 죽인 실제 뉴스를 떠올리면 굉장히 살벌하고 잔인한 발상이지만 이 얘기를 하면 여자친구들은 모두 웃었고 쉽게 공감했다. 반면에 남자들은 '늦은시간에 골목길을 왜 가?'라고 물었다. 안 가면 안되냐고. 그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두려움을. 어두운 골목길을 걸을 때 마음 깊은 곳 도사린 공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을.

평범하고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데 이유는 없다. 너무도 당연하기에.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