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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서 미안하대요" | 백남기 선생의 자녀 백도라지, 백민주화 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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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선생 청문회가 한창입니다. 강신명 전 청장은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해도 무조건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아주 기본적인 예의조차 망각한 것 같습니다.

백남기 선생은 작년 가을, 대통령이 공약을 지키지 않아 농민들이 다 죽게 생겼다며 공약을 지키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석하셨습니다. 늙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말입니다. 차마 폭력을 휘두르기도 힘든 백남기 선생에게 그날 경찰은 물대포를 정조준했습니다.

저는 어떤게 폭력인지, 누가 누구에게 폭력을 휘두른 건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늙고 아픈 노인의 그 한마디가 그렇게 위협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공약을 내팽겨치고 농민들의 삶을 나몰라라 한 대통령은 왜 그 거짓에 대해 하나도 책임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래는 작년 12월에 이루어진 백남기 선생의 가족분들과의 인터뷰입니다. 선생이 왜 그날 그곳에 올라갔는지, 선생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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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물대포 직사를 맞고 쓰러졌다. 경찰은 아무 저항도 못 하고 넘어진 남자에게 조준 사격을 계속했다. 드럼통도 쓰러트린다는 살인적인 물줄기를 계속해서 쏘아댔다. 두 사람이 쓰러진 남자를 구하러 뛰어들어갔다. 구하려는 사람은 쓰러진 사람을 질질질 끌고 갔고, 물대포는 쓰러진 남자를 계속해서 쫓아왔다. 그만하라고 고함치며 물대포를 막던 사람들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나부라졌다. 물대포는 계속 쫓아왔다. 물대포 너머의 누군가는 게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백남기 선생은 현재 중환자실에 있다. 가족들은 반쯤 체념했다. 치료가 아닌 기적을 바라고 있다고 한다. 슬퍼 울던 가족들의 두 눈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가족들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사이 이 사건의 가해자는 조준사격이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사과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시위전력이 많았던 폭도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백남기 선생이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건 처음이 아니다. 그는 81년 5월 학교에 탱크를 몰고 학교에 쳐들어온 군인에게 붙잡혔다. 전두환 정권은 그를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부었다. 성기를 불로 지졌다. '유신 잔당 장례식'을 거행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렸다.

평생 불의에 저항했고 그 때문에 국가 폭력에 시달렸어도 제 안위보다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던 그였다. 하지만 아무도 백남기 선생이 '왜' 거기에 나왔는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방송은 그가 그저 폭력적인 시위꾼에 불과하다고 묘사했다. 그래서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왜 그날 그 시위에 나갔는지. 또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Q. 선생님께서 대학 시절에 학생운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아버지가 처음부터 박정희를 싫어한 건 아니었대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잡았을 때, 혼란스러운 상황만 수습하고 다시 군인으로 돌아간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믿었대요. 그런데 돌아가지 않았잖아요. 자기가 정권 잡으려고 헌법을 뜯어고치고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아버지는'이건 아니지 않나'는 생각을 하셨대요. 그래서 운동을 시작하셨대요.

유신헌법 이후로는 계속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셨어요. 학교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하다가 결국 학교에선 제적됐죠. 아빠가 주동자니까 경찰은 아빠 잡겠다고 수배를 내리고, 아빠는 그거 피하려고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계셨어요. 그게 7년이 될 줄은 몰랐죠. 명동성당에 2년쯤 숨어계시다가 가톨릭에 귀의하시고, 이후 갈멜수녀원으로 옮겨 잡부 생활도 하고 수도사 생활도 하고 그러셨어요. 1980년, 박정희 죽고 나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시기가 있었잖아요. 그때 학교로 돌아가서 다시 운동 시작하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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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백남기 선생 복교 당시

Q. 민주화 운동에 참 열정적으로 임하셨네요

= 1980년도에 학교에 복교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신 게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이셨어요. 장례식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데 상여 만들 줄 아는 촌놈이 아빠밖에 없었대요. 상여 만들고 시위를 시작했는데 전두환이 학교로 탱크를 몰고 온 거죠. 시위 주도한 사람들이 기숙사에 모여 있었는데 후배가 아빠한테 그랬대요. "이거 느낌이 안 좋다. 일단 도망가자." 그런데 아버지는"우리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냐, 내가 왜 도망가느냐."고 말하고 거기 남아계셨고, 결국 군인들한테 끌려갔죠.

우리한테 그 이야기는 자세히는 안 해 주셨는데, 그때 고문도 많이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쯤 아빠한테 고문 후유증이 찾아왔어요. 허리가 너무 아프신데, 병원을 아무리 찾아 다녀도 원인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다리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어요. 아마 신경에 문제가 있었나 봐요. 그래서 한동안 걷지도 못하셨죠. 매일 밤마다 온찜질 해드리고, 수지침 놔드리고 했죠. 그때가 95년도쯤이었어요.

그 이후엔 일을 하다가도 몸에 무리가 생기면 바로 휴식을 취하셨어요. 한 번 심하게 아프셨으니까. 주변에서 후유증으로 고생이니 나라에 보상금이라도 신청하라고 하면 한사코 거부하셨어요'같이 운동한 친구 중에 죽은 녀석도 있고 또 몸은 안 상했어도 정신적으로 상처 입어서 고통 받는 사람들도 있는데, 얘네들은 보상금 못 받는다. 근데 내가 무슨 염치로 그 돈을 받느냐. 산 사람은 말이 없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Q. 81년, 3.1절 특사로 풀려나시고 나서 바로 고향인 보성으로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생활은 어떠셨나요?

= 그냥 평범한 농부였죠. 아빠는 원래 사람 엄청 좋아하고 욕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왜 대학생들 농활 오잖아요? 사실 농촌에서는 농활을 반기지 않아요. 농번기라 바쁜데 대학생들 와봤자 큰 도움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아빠는 농활대 오면 그렇게 잘해주셨어요. 맨날 밥해 먹이고, 술 사주고,이야기 나누고. 서울대 의대생들이 한 번 저희 집에 오기 시작하더니 6년 내내 찾아오더라고요.아버지한테 편지도 써서 보내고, 선물도 사 들고 오고. 그냥 좋은 사람이셨어요.

워낙 사람 좋고, 앞장서서 힘든 일 해결하고 나서니까 사람들이 이장 한번 해보라고 했대요. 그 당시에 이장은 나라에서 임명했었는데... 처음에 아빠는 손사래를 쳤죠. 아빠는 원래 부끄럼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하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막 "내가 이장할 거야~" 하고 욕심부리시는 분은 아니셨어요. 자리 욕심 같은 건 없으시고 오히려 사양하시는 분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아빠가 이장해야 한다고 하니까 정 그러면 투표로 뽑자고 하고 뽑히신 거죠.

아버지의 생각은 늘 그랬어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일을 맡아야 할 상황이니까 하시는 거. 실제로 아버지 귀농하기 전에 여기저기서 제의도 많이 왔대요. 의원 자리 하나 마련해줄 테니까 나와라. 그런데 아버지는 보상이니 돈이니 자리니 모두 다 거절하셨어요. "나 그런 거 받으려고 운동한 거 아니다. 죽은 사람들도 있다. 나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받냐"면서 다 거절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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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버지로서 백남기 선생은 어떤 분이셨나요?

= 어렸을 때는 엄하셨어요. 그때는 훈육이 필요해서 그랬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시려고 하셨어요. 저희 사는 데가 워낙 시골이라 사교육 같은 건 있지도 않았는데 그게 안타까우셨는지 직접 공부하시고 과외공부를 시켜주시더라고요. 한 1년쯤 지나니까 다른 엄마들도 자기 애들 가르쳐달라고 찾아오시더라고요. 이기적인 마음엔 제 자식만 잘되라고 거절하실 만도 한데, 그러질 않으셨어요. '내 자식이 1등 해야지...' 같은 마음은 하나도 없으셨어요. 다 같이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이셨어요. 그래서 돈 한 푼 안 받으시고 매일 간식해 먹이면서 가르치셨죠. 그때 같이 배운 친구들은 다 잘됐어요. 그 친구들도 며칠 전에 아버지를 찾아왔어요...

자식으로서 아빠가 특별히 훌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냥 우리 아빠니까.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게 맞는 삶이라고 생각했죠. 사람들이 찾아와서'이렇게 존경스러운 아버지를 두셨다'고 하셨는데. 그냥 저한테는 우리 아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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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버지는 그날 왜 집회에 나가셨나요?

= 아빠는 농민이잖아요. 농민들이 먹고살기 힘드니까 나가셨어요. 쌀 한 가마니에 15만 원도 안 돼요. 이렇게 팔면 기본적인 생활조차 힘들어져요. 문제점이 심각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쌀값을 17만 원에서 21만 원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더 떨어졌죠. 대통령한테 공약 지키라고 말하려고 나간 거였어요. 농민들 이러다 다 굶어 죽는다고. 그래서 나간 건데... (울음)... 그날 아침으로 되돌리고 싶어요. 아빠 저렇게 되기 전날로...

솔직히 아빠가 너무 불쌍해요. 왜 그 추운 날 그 자리까지 나가셔서 그렇게 싸우셔야 했나. 저렇게 평생을 바쳐서 싸우고 누워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잖아요. 아빠가 누가 알아달라고 나서신 건 아니지만 그만큼 힘들게 싸우셨으면 인제 그만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도 되는 거잖아요. 딸의 입장에서는 그래요. '아빠는 대의를 위해 싸우셨다' 그런 이야기 말고 그냥 아빠로서 할아버지로서 그렇게 자기 삶 즐기다 가셔도 되는 거잖아요.

아빠가 저렇게 된 것도 안쓰러운데, 아빠가 평생을 바쳐 싸워온 세상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게 너무 화가 나요. 그런데도 아빠는 자기가 미안하대요. 자기가 그렇게 나섰던 건 내 자녀들이,후손들이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어서 그렇게 싸워왔던 건데 지금 보니 달라진 게 없어서 너무 미안하대요. 어떻게 인생이 그래요. 너무 불쌍하잖아요. 이렇게 쓰러진 거 보니까 너무 허망하잖아요. 그렇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지도 않잖아요. 우리 아빤 저렇게 누워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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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딸로서는 더더욱 안타까움이 클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라 너무 무력하고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라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요.

=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겨우 버티고 있어요. 그런데 안 그런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오늘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 백남기 그 사람 너무 아니지 않아요?" 옆에 같이 탔던 삼촌이 화가 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35년 동안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던 분이라고 답하니까 택시기사가 "아니 티비에서 보니까 평생 데모꾼으로 살았더구만, 손님들도 다 그 사람 폭도라고 하던데."라고 말하시더라고요.

어쩌면 같은 세상을 사는데 이렇게 정반대로 생각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들이 이렇게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워지더라고요. 너무 이해가 안 돼요. 폭도고 데모꾼이면 죽여도 된다는 거에요? 죽어도 싼 거에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너무 이해가 안 돼요. 죽어도 싼 사람은 없잖아요. 누구의 목숨도 그렇게 가벼이 여기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인터넷에서 댓글 다는 사람들은 아빠가 사기 치는 거 아니냐고 묻데요. 생명에 지장 없는 데 쇼 하는 거 아니냐고. 지들이 와봤냐고요. 와서 우리 아빠를 봤냐고요. 사람이 이만큼 다쳤잖아요. 그러면 그냥 입 좀 조용히 하고 상처 좀 안 주면 안 되는 거예요?


백남기 선생의 세 자녀 이름은 각각 도라지, 두산, 민주화이다. 도라지는 민중을, 백두산은 통일을, 민주화는 말 그대로 민주화를 의미한다. 선생은 자식들의 이름을 지을 때도 오직 나라와 사람만을 생각하셨다.

선생의 자녀들은 이제 아버지의 역사를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다. 비록 불의한 역사였지만 제 몸 사리지 않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우린 정말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백남기 선생의 쾌유를 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