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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관용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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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몰 이희은닷컴의 대표 이희은 씨가 사진작가 로타와 작업을 했다. 어린아이처럼 피부를 표현하고 파스텔톤으로 모든 색깔을 죽여버리며 '수동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아이처럼 만들어서 생산하는'(여기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기에 작은 따옴표로 표시한다) 로타와 작업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많은 악플이 달렸다. 이희은 씨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반박하는 글을 실은 모양이다. 위키트리인가 인사이트인가에서 본 반박글이 인상적이라 복사해 두었다.
 

"성범죄자들을 만드는 건 제 사진이 아니고 그네들 잘못 아닐까요. 아니, 미니스커트가 성범죄를 조장한다는 식의 쌍팔년도 구라논리를 그렇게 당당하게 설파하고있어 ㅡ.ㅡ 남자들이 제 사진을 보면 오예 나가서 여자들을 강간해야지 성추행 해야지 이런답니까? 설사 그런다 한들 그게 제 사진 때문이에요? 그냥 그자식 고장난 두뇌회로 때문이지"

최근의 '로리타 논쟁'은 두 가지 맥락을 가지고 있다.

1) 여성의 수동적이고 유아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2) 소아성애적 이미지를 확산시킴으로써 아이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 논쟁에는 매우 핵심적인 문제가 걸려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결정권은 오랫동안 여성운동이 얻기 위해 노력했던 아주 중요한 개념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의미에서는 '결정적'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결정권을 말하는 여성들에게 '로리타' 이미지를 거부하는 어떤 이들은 취향이라는 것이 온전히 자기결정적이라고 신뢰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 자기결정적 취향 자체도 가부장적 시스템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논의는 여성들은 오랫동안 미숙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남아있기를 요구 당했기 때문에 현실의 기울어진 세계에서는 더욱 주체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우리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덧붙는다.
 


우리 아이들이 위험하다


어린 시절.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우리 아이들'이었던 때가 있었다. 현재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어린 시절의 나를 돌이켜보면, 나는 무척 미숙했다. 미숙했고 원치 않은 섹스를 했다. 사회심리학자 데보라 데이비스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모호함의 춤(dance of ambiguity)" 사이에서 어떻게 내 결정에 대해 주장해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내가 어디까지를 원하는 것인지를 인지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은 당시의 내가 (성적 관념들에 익숙지 않고 심지어는 '보호'받고 있던) 10대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10대의 나는 당시의 성적 관계들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 때로는 성적 관계를 넘어서서 사회적 고정관념이 그 관계에 깊숙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나의 고통을 그런 언어로밖에 표기할 수 없었던 탓이다. 고정관념에 근거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내 고통이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그조차 혼란스럽다. 사회적 맥락이 내 안에서 분명해지고 나서 심정적 고통이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또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아닌 척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섹스 이후의 상실감에 대해서 상대 남성에게 토로하자, 그 남성이 "나도 상처를 입고 상실감을 느꼈다"고 말했을 때는 그 성별의 기울어짐을 설명할 방법을 몰라서 다시 절망에 빠졌다. 나는 성적 관계에 있어서 자유롭고 싶었다. 10대인 자신을 옭아매는 성적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 고통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유로우면서도 위험하지 않을 수 있다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것은 지향점이다. 자유로우면서도 위험하지 않은 세계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자유와 안전이 별개의 문제가 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당시의 나에게 언제나 위험은 쾌락과 연결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내게 그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 경고에는 언제나 '쾌락과 그 쾌락을 누릴 자유를 포기하라'는 사인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나는 그 쾌락과 자유를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 위험을 그냥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내게 그 쾌락과 자유를 포기하게 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청소년 운동 활동가들이 '보호받는'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 하는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누군가의 쾌락과 자유를 배제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성년과 미성년이 성적 관계로 결합하는 경우, 미성년이 성적 착취를 당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는 현재로서는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확률이 높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성적 관계 일반을 도덕적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그런 형태의 사건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엄밀히 말해야 하는 것과 일반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런 형태로 평평하게 논의를 가져간다면 '복잡한 문제'는 가려지고 만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청소년의 성적 자유, 혹은 그 자유에 대한 탐구 같은 것들이 그렇다.
 


만연한 것과 만연하지 않은 것



 
최근 많이 보았던 것 중 하나가 로타와 함께 작업한 설리의 사진(팔과 다리가 접혀 있다)과 소위 '다루마(오뚜기)'내지는 '테디베어'라고 불리는 서브컬쳐 코드를 연관시킨 글이다. 이 이미지의 병렬은 딥웹에서 떠돌아다닌다는 팔다리를 자른 여성 노예 만드는 과정을 상세하게 쓴 글과 함께 돌아다닌다. 이런 이미지의 병치는 명백하게 공포를 먹이로 삼은 사기에 가깝다.
 
심각한 수준의 폭력적 이미지와 그렇지 않은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고가 배제·처벌·검열을 중심으로 구성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가장 심각한 수준의 이미지를 눈앞에 들이밀고서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모두 뒤섞어버리는 것은 비평이 아니다. 비평이 아닐뿐더러 옳지도 않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척 해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설리가 조금 '성적인' 사진을 올리기만 해도 댓글에서 아우성을 친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교복을 비롯해 '어린아이처럼 보일 수 있는'(도 역시 사람마다 다르게 읽힐 수 있다고 느껴서 따옴표를 친다) 옷을 입은 사진을 올린 사람들에게 "로리충" "페도충"이라는 오명을 붙이고 아이들을 성적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제일 위에서 언급한 이희은 씨의 경우도 그렇다. 성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취급하다 보니 그 사이에 어떤 박해가 존재하는지는 심각하게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조직적으로 개인을 박해하면서도 그것이 박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논의는 퇴행적이다. 사회에 '만연한' 괴물성(여기서는 로리타 적이라고 불리는 이미지가 그렇다)을 적시하고, 그 괴물성을 배제하면 온전하게 사회가 돌아갈 것으로 상정하는 것. 그 와중에 "테디베어 성노예"에 대한 불쾌한 성적 재현이 포함된다. 사회에 '만연한' 것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만연하지 않은 것'을 뒤섞는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만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에 기대어 수사를 사용한다. 그 이미지가 진짜로 사회를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수사들이 정말로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이 논의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이 정말로 '로리충'인지. 물론 이 질문을 하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논의에서 너무 중요하게 다루는 바람에 사라져버린 것은 미성년의 섹슈얼리티다. 그리고 성인(남성)의 섹슈얼리티는 통제가 불가능한 핵폭탄처럼 그려진다. "성폭력은 통제 가능한 문제"라고 지속적으로 페미니즘이 말해왔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그림이다.
 


욕망을 검열할 수는 없다



 
나는 '피해자' 혹은 '희생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는 더 많은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에 적극 공감한다. 그래서 이 말이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무척 조심스럽다. 그래도 이 말을 해야만 한다. '약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약자'에 머무르는 것은 다르다. 속한 집단을 희생자로 포지셔닝하는 것만으로 세상은 변화하지 않는다. 포지셔닝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피해자를 상정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정말로 피해가 발생하였는지, 얼마나 그 피해가 일반적인지, 우리의 집단 안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로타의 이미지 같은 가상의 텍스트가 집단에 대한 진술을 대체하게 할 순 없다.
 
설령 '로리타 논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로타의 사진을 보고 성범죄를 일으킨 사람이 있다고 할지언정, 로타가 만든 이미지 그 자체에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런 사건이 발생한다고 할지언정 여전히 그것은 비평이 아니다. 비평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전복'에 있다.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이미지를 어떻게 읽어낼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향유자의 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비평이다. 이왕 비평이라는 칼을 들고 그것을 검열으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도 아까운 일이다.
 
내가 최근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로타의 이미지가 구현하는 '평평한' '2차원의' 여성상에 몸을 주체적으로 맞추는 여성들이다. 이희은 씨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로타와 적극적으로 작업을 하고 싶어하며, 만다라케에서 팔리는 예쁜 17금 상업지 같은 이미지에 매혹을 느낀다. B216·스노우·카메라360·Pitu같은 셀피 앱이 유행하고, 그 이미지들은 현실과 다른 환상의 '자신'을 만들어낸다. 그녀들에게 모두 '자의식이 빻은'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진보를 낳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들에게는 2차원의 장벽이 필요할지도 모르고, 개인주의적 세계를 재현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이 어떤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주시해야 한다. (로타의 이미지를 포함해서) 진보하고 있는 것들을 단순하게 선언함으로써 검열하는 것이 결론적으로 더 많은 숨통을 막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나는 이희은 씨의 분노에 공감을 표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우리의 '빻은' 욕망은 원한다면 용인되어야 한다. 욕망을 검열할 수는 없다. 그것이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수동적으로 전시하고 싶은 마조히즘적 욕망이라고 해도, 그곳에서는 자기결정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 검열과 배제에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페미니즘에서 더 많은 욕망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관용은 폭력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