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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리고 '정중식, 보통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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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영화나 소설에 대해 얘기할 때 '스포일링'에 신경을 쓰면서 글을 잘 쓰지 못해요. 그런 데에 예민하신 분은 부디 나중에 읽어주세요.



 
중식이밴드의 리드 보컬 정중식 씨가 쓴 페이스북 글에 대한 비판을 어제와 그제 하루 종일 보았다. 나는 어제 결혼식도 장례식장도 가야 해서 집회에 가지 못했다. 집회에 가는 대신 켄 로치의 새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다.
 
2011년 초에 최고은 작가가 죽었을 때 나는 며칠 동안을 잠도 못 자고 울었다. 사회 제도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 안타깝고 슬퍼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두려웠다. '차라리 우리 모두 고양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그러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쓰레기 봉지라도 뒤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낮에는 조교로 일했고 밤에는 주 2~3회 정도 토킹 바에서 일했고, 주말엔 과외를 했다. 매주 회의, 가판, 포럼 등이 있었고, 조교로 일하는 틈틈이 1인 시위를 한다거나 대자보를 쓴다거나 학내 연대체 등에 참여했다. 그래도 돈은 늘 부족했고, 막판에는 함께 살던 친구에게 두 달 정도 집세를 주지 못했다. 그때는 매일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최고은 작가의 삶이 내 미래일 것만 같아서 그냥 미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무서워서 많이 울었다.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거의 통곡하듯이 울었다. 바닥은 엄존하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도 엄존한다. 그건 지우려고 한다고 지워지는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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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다니엘 블레이크는 목수다. 상처하였고, 심장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어서 질병수당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그는 지난 시기의 사람이다. 켄 로치가 언제나 그리는 '노동자들의 공동체'가 처음부터 등장한다. 복직할 수 있느냐면서 서로 오랜 시간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은 정답게 '남성적' 농담을 건네고,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만큼 베푼다. 그는 적어도 이 공동체가 훼손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노동계급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 왔다. 유니온이 있고 동지가 있고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회적 보호막이 있는 세계관. 경제적 바운더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당연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원래 살고 있던 세계관 밖으로 밀려나면서, 끝끝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의 이야기다.
 
물론 다니엘 블레이크는 훌륭하고 인격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끝까지 다니엘 블레이크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가 훌륭하고 인격적인 것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엄이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며 평생 살아왔다. 그 삶에 대한 신뢰는 한 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과 배척되는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분노하고 싸우려고 든다. 쉽게 절망감을 느끼고 세계에 도전하는 것을 포기하기에는 그는 너무 오래 걸어왔다.
 
이미 '인간다운 세계' 밖으로 몰려난 사람들이 모여 있던 구직센터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는 케이티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다니엘 블레이크였다는 것은 그가 지금껏 쌓아온 삶에 대한 신뢰, 자기 존중감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곳에 모여 있는, 몰릴 대로 몰린 사람들은 그런 목소리를 낼 용기가 없다. 내가 몸담은 세상이 나를 지켜주지 않을 때 '준법'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옆집에 사는 흑인 청년은 신뢰에 기반한 자기 공동체를 구축하고 있지만, 그건 법적 테두리로 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밀수를 해서 위법을 저지르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존엄하게 유지해 나가려고 한다.
 
가장 나를 울게 만들었던 건 주연인 케이티다. 이미 시작부터 '인간다운 세계'에서 쫓겨나 있었던 사람. 하지만 자녀를 버리지도 않았고, 공부를 하겠다는 꿈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세계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좀 더 강력한 사회적 존엄이 요구된다. 그녀는 식료품 지원을 받다가 스파게티 소스 캔을 뜯어서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가다 엄청난 수치를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여성들은 자신의 가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에도 제한과 위험이 따르며, 사회적 제재가 가해진다. 물론 이 '제재'가 감옥에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 것이다.

중식이 밴드의 정중식이 사람들에게 공분을 샀다. 그는 "보통 젊은 남자"에 대해서 말하면서, "월 200이상 못 벌"고, "자신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고, "노가다판에서 일할 땐.. 가끔 소장님이 노래방 도우미도 부르"는 삶을 얘기했다. "가끔 리벤지 포르노를 보는 찌질한" 남자가 "보통 젊은 남자"라고 했다. 사실 그 글 전체는 자신의 밴드가 계속해서 '여혐 밴드'라고 지칭되며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하소연하는 것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이 부분에 집중했다.
 
나는 많은 여성들이 '보통 젊은 남자'가 저렇다는 서술에 분노하는 데에 공감한다. 정중식의 글은 마치 그렇기에 그것을 '이해'하고 '옹호'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모든 이해가 옹호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것을 등치시킨다. 나 역시 저런 '보통'의 삶을 옹호할 수 없다. 내 경험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합리화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 나아져야 할 것이고,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이 '보통'이라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이런 트윗도 보았다.
 

"중식이의 자기고백 읽고 소름끼치는 것..유영철 등이 생각난다. 그들도 일생동안 소외된 남성이고 빈곤층이었다. 그래서 그가 아무도 착취하지 않고, 해치지 않았나? 더 약자인 여성/사람들을 고문하고 생명을 뺏었고, 생존자에게도 고통을 남겼다."

 
이 트윗을 읽고 몹시 놀랐고, 사회에 칸막이가 어느 정도 있는 건지 의심했다. '소외된 남성' '빈곤층' '젠더 의식 부재'. 여기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이 유영철까지 나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보통 사람이 맞다. 남성 혐오도 아니다. 저 글을 읽었을 때 내가 떠올렸던 건, 중학생 때 오빠가 컴퓨터 안에 숨겨두었던 [유출] 꺾쇠가 달린 동영상, 성매매를 했다는 걸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나랑 엄청나게 싸웠던 내 친구, 성노동자한테 반해서 매일 찾아가더니 오늘은 섹스를 안 했다고 뿌듯해하던 내 친구, 아는 형이 자기 너무 힘들다면서 노래방 데려가더니 노래방 도우미 불러서 떨떠름하게 있다가 나왔다던 내 친구, 집에 빚 갚느라 돈 보내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며 오늘 같이 있어달라고 술에 취한 날 만지며 징징 울던 아는 오빠. 그 사람들은 유영철이 아니다. 소라넷 회원이 100만 명이었고, 촛불이 100만 명이었다. 우리는 100만 촛불이 나왔을 때 이 보편성 속에서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다. 대체 왜 보편의 기준이 이렇게 상이한가.

물론 이런 세계에는 동시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건만남 했던 경험을 울면서 고백하던 내 친구, '단란주점'에 나가는 바람에 내 (남자사람)친구와 헤어져야 했던 여성분. 친구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자기 친구들에게 '아, 네 구여친. 그 단란하시던 분.' 같은 얘기를 들었다. 네이트 판에 가끔 올라오는 성노동자들의 글에는 '같은 여자지만' 을 전제로 한 '창년들'이라는 비난이 우르르 쏟아진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보편을 인정하지 않으면 보편적인 여성 억압의 경험도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억압받는 여성들은 적어도 '존엄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이길' 강제당한다.

최고은 작가가 죽을 때쯤, 나는 토킹바에서 일을 했다. 매일 조금씩 일찍 나와서 올리브영이나 왓슨스에 서서 화장을 했다. 나는 화장품을 살 돈이 없었고, 화장을 해야 그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를, 가난하지 않기 위해 강요당했다. 알바생의 눈치가 보여서 이어폰을 끼고 그냥 찍어바르는 척 하며 정말 열심히 화장을 했다. 물론 알바생 눈에는 내가 너무도 진상이었을 것이다. 매일같이 오는데 그냥 찍어발라보는 것일 리가 없잖아. 돈이 없어서 출근할 때는 버스를 타고 퇴근할 때는 걸어서 퇴근했는데, 어느 날 새벽에 걸어서 퇴근하다 칼을 든 괴한에게 강도를 당하는 바람에 그 다음부터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퇴근해야만 했다. 강도를 당했다고 경찰서에 가자, 경찰은 날 강제로 야산으로 끌고가려고 한 점이 수상쩍다면서 바에서 일하는 손님 아니냐고, 연락하고 지내던 남자 아니냐고 물어왔다. 아니라고 해도 '바에서 만나는 사람이 많아서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다시 물어왔다.
 
그 바에 찾아오는 남자들은 나에게 비싼 술을 많이 샀다. 나는 화장품 살 돈도 없는데, 택시 타는 게 아까워서 강도를 당하는데, 나에게 술을 사면서 자기 존엄을 확인하려고 들었다. 잘난 척을 하거나 누군가를 욕하고 내 연락처를 따려고 들고 매일 조르고 집에 가는 길에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내 연락처를 준 적이 없다. 어떤 남자는 술에 취해서 80만원을 팁으로 주려고 한 적이 있었다. 사장은 내가 그 돈을 안 받은 게 잘못이라며 나를 질타했다. 사장은 나의 가난을 알고 있었고, 내가 그 돈을 받는 게 이익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요구들을 거절하는 게, 적어도 내 존엄이었다.
 

하지만 나는 케이티와 같은 '허기'의 경험이 있다. 안주를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갈 때면 사장 몰래 냉장고 안에 있는 김치를 폭식했다. 아무 것도 없고 그저 김치뿐이었는데, 나는 김치를 먹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삼각김밥과 라면은 '김치'가 아니었다. 나는 김치를 와구와구 입안에 밀어넣고 시치미를 떼고 우물거리며 안주를 만들었다.
 
나는 그 당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정신을 노동하는 일을 할 때는 가난과 정신노동에 지쳐서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공부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편도 아니고 사람에게 뛰어나게 자신을 포장해서 어필하는 것도 잘 못하는 편이라 과외는 나에게 임기응변을 너무 많이 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논술학원 강사로 일해본 적도 있었는데, 학생의 고민상담을 들어주다가 학부모에게 항의를 듣고 잘린 이후로는 너무 질려서 하고 싶지 않아졌다. 나에게 소설을 쓰고,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내 자아를 실현하는,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나는 내 정신이 그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준비도 필요 없이 새벽 2시면 모든 걸 잊는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다.

함께 활동하던 한 여성 동지가 '서영 씨도 그게 여성억압적인 걸 뻔히 알면서, 그런 일은 안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이해했다. 그건 그 사람 나름대로의 존엄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일에서 거리를 두는 것을 활동가의 자부심으로 갖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케이티는 단지 '먹고 살기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밑창이 떨어진 딸의 신발을 사주기 위해서 성매매를 시작한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녀가 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건만남을 했던 내 친구는 대체로 남자들에게 20만 원을 제시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15만 원으로 깎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거절을 했다. 남자는 15만 원에 안 되겠냐고, 돈이 그거밖에 없다며 2시간 동안 그녀를 붙들고 사정을 했지만 그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녀는 그날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교통비만 썼다며 울었다. 나는 그녀가 왜 15만 원에 그 남자와 섹스를 하지 않았는지 다 알았기 때문에 그냥 같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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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블레이크는 영화 속에서 정말 끔찍한 행동을 한다. 케이티의 손님으로 성매매하는 케이티를 찾아간다. 그는 케이티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기에 케이티와 대화를 하려고 하지만, 케이티는 도망가고, 돌아가라고 외치고 포옹하려는 다니엘을 뿌리친다. 다니엘은 그녀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그녀의 존엄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짓뭉갰다. 그건 선의에 기초해서 이뤄진 일이었다. 퇴근길에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토악질을 하고 있을 때 나를 스토킹하던 남자가 내 퇴근을 기다리다가 날 붙잡고 운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같은 말을 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주먹질을 하고 싶었다. 정말, 주먹질을 하고 싶었다. 네가 빈곤한 여성으로서 산다는 게 뭔지 아느냐고. 내가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어야 하는지, 얼마나 그렇게 살아남기를 강요당하는지.
 
다니엘 블레이크의 옆집에 사는 청년은 밀수를 해서 운동화를 팔고, 그걸로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켄 로치는 굳이 그에게 기업의 이윤 외에는 아무것도 다치게 하지 않는 범죄를 저지르게 했지만(이는 감독의 윤리적 의도일 것이다) 실제 삶에서 자신의 존엄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기준이 통용되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무려 '선량한' 사람들이다. 내게 와서 자신의 존엄을 확인받으려고 지랄을 하던 그 아저씨들도 자기 나름대로는 선량하며, 성매매를 하면서 '그냥 물 빼는 것'이라고 표현한 내 친구도 자기 나름대로는 선량한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세계는 악인과 선인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그들 모두는 보통 사람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에 따라 서로 다른 존엄의 형태를 갖는다. 그리고 공동체가 해체될수록 그 존엄의 형태는 윤리와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까지 공동체가 해체되다보면 누군가를 배제하고 공격하는 것으로만 존엄을 세울 수 있는 시대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윤리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양아치라고 청년에게 투덜거리지만 굳이 청년을 그 이상 닦아세우진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청년 같은 삶을 살 의향이 없다. 그는 낡은 시대의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삶을 살겠다는 노력은 존중받고, 고무되어야 마땅하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서로를 단죄함으로써 그곳에서 발을 빼려는 선택은 너무 쉽고 위험하다. 그건 아무것도 고무할 수가 없다. 어린왕자의 여우는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한 말과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나는 그 말을 처절하게 이해한다. 진짜 사악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을 못 다루는 다니엘 블레이크는 엄청나게 몇 달간 고생을 하다가, 너무도 쉽게 옆집 청년의 도움을 받아서 질병수당 항고 용지를 프린트하면서 청년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 "그 새끼들은 우리가 바닥까지 떨어지길 기다리는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새끼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마우스를 다룰 줄도 모르는 다니엘 블레이크 앞에는 막막한 컴퓨터 화면만 펼쳐져 있을 뿐, 그것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인간을 만났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면대면의 구시대는 증발해 있다. 구시대가 증발하면서 공동체는 붕괴했고, 결국 남아있는 건 얼굴이 아닌 시스템뿐이다.
 
노동조합에서 내가 했던 일들 중 아주 많은 일은 65세가 넘은 사람들의 스마트폰을 만지는 것이었다. 버스에 달려있는 앞차 뒷차 간격 체크만으로는 얼마나 막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어플 '김기사'를 반드시 깔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분들은 스마트폰에 김기사를 깔 줄 모른다. 김기사를 깔지 않으면 간격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제재와 벌점을 받게 된다. 벌점이 쌓이거나 사고를 내게 되면 그들은 '버스 운전자격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 재심사는 공인인증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로 신청한다. 그 사람들은 공인인증서를 다룰 줄 모른다. 그 와중에 공인인증서 비밀번호에 이제는 특수 기호도 써야 한다. 그들에겐 회계사가 없고, 컴퓨터가 연말정산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다룰 수 없다. 나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연말 정산을 혼자 치러야 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노동조합에 속해 있었고, 내가 있었다. 하지만 이 테두리 밖으로 나간다면? 컴퓨터 화면은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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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I, Daniel Blake]로 시작하는 그래피티 작품을 그는 구직센터 벽에 남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질병 수당 항고 날짜를 잡아달라고 요구한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자신을 막으려고 온 구직센터 직원에게 "이건 내 최초의 예술작품"이라고 말하는 걸 보고, 어쩌면 그의 성이 블레이크인 이유가 또 다른 블레이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낭만주의 시인이다. 산업화 시대가 아닌 오래 된 시대의 '인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이 기계화 된 시스템과 시장 경제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19세기 초였다. 그리고 그는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시스템에 함몰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악'에 대해서 끝까지 저항했다. 졌지만.
 
19세기 초보다 2016년에는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많아졌다. 그것은 통장에 찍히는 숫자, 고용보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 뭉치,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제출하는 '증명서'(노조에서 일할 때는 아직 사고 후유증으로 아파서 일을 못 하는데, 면접 봤다고 증명 좀 해 달라며 명함 받아가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많았던지), 보조금을 받기 위해 듣는 직업 교육, 줄어드는 복지 예산, 구멍이 난 국민연금, "일자리가 부족해서" 라는 어휘들, 국세청에서 날아오는 경고장, '신용등급이 안 됩니다' 라고 뜨는 컴퓨터 화면 같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자기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 증명하고 싶어서건, 증명하지 않아서는 안 되서건 간에.
 
아빠는 무릎이 불편하다. 집이 망하고 난 다음부터는 차를 몰 수 없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걸어야 하지만, 아빠는 점점 더 무릎이 안 좋아졌다. 언젠가 가족이 외식을 하는데 아빠는 빨리 걷지를 못해서 점점 뒤처졌다. 엄마와 동생과 나는 조금 앞서 걷다가 아빠를 기다렸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아빠는 점점 뒤처지더니, 갑자기 어느 순간 '나는 그냥 집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우리를 쫓아와서가 아니라 엄마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서. 우리는 아빠를 굳이 찾으려고 들지 않고, 그냥 차를 마시러 가버렸다. 이제 차도 없고 그렇다고 택시를 탈 수도 없는데, 늙고 아파서 우리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다. 아빠를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고 먼저 집에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아빠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런 세상에 태어날 바에야 굳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한다.
 
하지만 기왕에 인간으로 태어났는 걸 어쩌겠는가.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렇게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가 윤리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정말로 우리가 '회복'할 수 있을지.
 
오늘은 교회에 갔더니 야고보서 5장을 읽게 되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자신의 올바름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근거로 타자를 끌어안는 공동체라니.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정말로 있었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나. 나는 이 구절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찔끔 났고 그냥 인간 다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 미안.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