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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엄'을 말하는 켄 로치 감독이 놓친 '성노동자의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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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놓쳤던 물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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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영화사 진진

올해 나이 80세. 아직 자본주의에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켄 로치 감독은 은퇴를 번복하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심장질환으로 일할 수 없게 된 늙은 목수 다니엘의 질병 수당 신청 분투기이자, 어린아이 둘과 노숙자 쉼터를 전전하다 다니엘의 이웃이 된 싱글맘 케이티의 처절한 생존기이다. 백전노장 좌파 감독 켄 로치는 이 둘의 삶을 통해 영국 보수당의 복지정책과 민영화, 영혼 없는 관료들이 어떻게 인간의 자존심을 짓밟고 존엄을 무너뜨리는지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위안이 되는 이웃들의 모습을 통해 연대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지탱해 주는지도 보여준다.

"인간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는 다니엘의 대사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켄 로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같은 체제와 성실히 일하지만 가난한 시민을 대립시킨다.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의 구도가 선명하고 익숙하다. 관객들은 누가 가해자인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바로 파악한다. 이 교과서 같은 구도의 이야기를 지루하고 뻔하지 않게 풀어가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대부분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감독의 메시지에 공명한다. 사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대의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쁜 강자의 악한 정책들도 명분은 인간의 존엄을 위한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감독의 지당한 존중에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다른 물음을 던져보려 한다. 나쁜 강자가 표방하는 인간의 존엄과, 선한 약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존엄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갈리는가? 강자는 언제나 존엄을 훼손하는 존재이고, 약자인 우리는 훼손당하기만 하는 피해자인가? 존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나와 타인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가?

다니엘의 순도 100% 선의, 어떻게 봐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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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블레이크의 선의. 하지만 그 선의는 어딘가 불안하다.ⓒ 영화사 진진

케이티는 생리대와 여성용품을 훔치다 마트의 관리인에게 들킨다. 그 상황 이전에도 그녀는 식료품 배급소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의 소스를 덜어 먹다 주저앉고 만다. 허기로 덜덜 떨리는 손을 닦으며 그녀는 울며 말한다. 내 삶이 늪에 빠진 것 같다고. 사면초가의 늪에서 케이티가 선택한 일은 성 노동이다. 우연히 이를 알게 된 다니엘은 업소에까지 찾아간다. 당황한 케이티 앞에서 다니엘은 그녀의 처지를 비참해하며 운다. "이런 일까지 하지 않아도 돼..." 이제 막 시작한 이 일로 삼백 파운드를 벌었고, 아이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먹일 수 있다고 변명처럼 항변해보지만, 그녀 역시 비참해진다.

바로 이 장면과 다니엘의 말 '이런 일'에서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지지, 자존심, 존엄의 실체가 무엇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케이티의 성 노동을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막장의 행위로 여긴다. 식료품 배급소에서는 그녀가 혹여 타인들 앞에서 비참해질까 봐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는데, 성매매라는 케이티의 노동에 대해서는 타인의 시선으로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본다. 다니엘의 안타까움은 순도 백 퍼센트 선의다. 그래서 케이티는 더 비참하다. 자신이 신뢰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들켜버린 치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미안함. 복잡한 마음이 얽힌다. 다니엘의 선의는 과연 그녀의 존엄을 지켜주는 걸까?

인간에게 존엄이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지 스스로 규정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존엄을 지킬 수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이 일은 하지 않겠다든지,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나는 이 일이 괜찮다든지 그 기준을 내가 정할 수 있을 때 '나'는 실존적으로 존엄한 존재가 된다. 타인의 삶에 위해를 가하거나 위법한 일이 아닌 이상 누구든 자기 삶의 기준을 스스로 정할 수 있고, 타인은 그 기준을 존중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성매매 노동은 영국에서는 위법이 아니다)

케이티의 선택이 그녀 개인이 가진 삶의 기준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 노동은 그녀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다. 그녀는 잠깐의 노동으로 삼백 파운드를 벌었고 노동의 성과로 아이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먹일 수 있게 됐다. 그 교환이 그녀에게 의미 있는 것이라면 그걸로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노동을 비참한 일로 평가하는 타인의 규범에 노출된 순간 그녀는 불행해진다. 그 타인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존재일수록 자존심은 더 크게 무너지게 된다. 성 노동자가 느끼는 모멸감은 내 이웃, 내가 속한 사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성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그것은 노골적인 멸시나 비난이 아니라 다니엘의 경우처럼 선의에 기반을 둔 한탄과 연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사회구성원들이 편견의 시선으로 성 노동자를 바라보는 한, 그들은 스스로 기준에서 문제 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존엄을 확신하지 못한다.

성노동이라는 선택은 왜 '이런 일'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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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아쉽다. 좋은 영화이기에 더더욱.ⓒ 영화사 진진

노련한 좌파 감독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체제를 여느 때처럼 비판하면서, 그 안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영혼 없는 관료 집단에도 최선을 다해 남을 도우려는 선한 존재가 있고, 동료 시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서로의 작은 울타리가 되어주는 선한 이웃들이 있다. 주체로서 나의 의지, 동료 시민의 우애, 작은 저항들이 곳곳에 배치된다.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나쁜 체제에 날카로운 비판을,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약자들에게는 연대의 필요와 우애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비판과 찬사, 그 양자 사이에서 나는 물음 하나가 아쉽다. 과연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것은 나쁜 체제, 나쁜 권력, 나쁜 강자들일 뿐인가?

만일, 성 노동을 하게 된 케이티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 신뢰하는 조력자 다니엘이 "네가 어떤 일을 하든 내게 너는 똑같은 케이티야", "너의 수고로 아이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먹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성매매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잠시 뒤로 하더라도 케이티가 느꼈을 비참함은 훨씬 덜하지 않았을까?

다니엘처럼 케이티 또한 열심히 살았고, 성심껏 이웃을 도왔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녀는 다니엘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저녁을 대접하고 자신은 손이 떨리는 허기를 감내하며 굶는다. 나는 타인의 도움을 인식하고, 이를 고맙게 여기며, 최선을 다해 돌려주려 노력하는 인간이라는 것. 그것이 밑바닥 삶 속에서도 그녀가 지키려는 자존심이다. 다니엘은 그녀의 배고픔을 알면서도 기꺼이 호의를 받아들인다. 그녀의 자존심을 먼저 배려하는 그 태도가 왜 성 노동을 선택한 상황에서는 지켜지지 못했을까?

켄 로치 감독은 이 영화를 개봉하면서 "가난은 너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라고 했다. 그렇다. 성 노동을 '이런 일'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성 노동자에게는 잔인한 일이다. 영화 속 다니엘의 말처럼, 힘겨운 삶을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는 우리한테는 -비록 선의에 기댄 것일지라도- 편견이나 평가, 심판의 말 대신 그저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할 뿐이다.

나와 당신이 서로에게 그 바람이 되어 줄 때, 비록 나쁜 정부가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릴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홈페이지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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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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