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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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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작은 나라고, 섬나라다. 영국인들은 사실 뭐 그리 개방적이지도 변화에 익숙하지도 않다. 영국인의 상당수가 메뉴 변경 없이 평생 치즈 샌드위치를 도시락으로 싸간다고 하는 기사를 본 적도 있거니와, 음식마저도 새로운 시도를 잘 하지 않는 민족이다.

따지고 보면 유럽에서는 영국만 용맹하게 나치에 맞서 싸웠다. 레지스탕스가 있었다지만 프랑스는 접수된 지 오래였고 유럽은 거의 몽땅 이태리+독일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스위스는 '중립'이었고) 영국만이 자국의 젊은이들을(때로는 중늙은이들도) 인종주의와 전체주의로 똘똘 뭉친 집단에 맞서 싸운 거다. 자랑스러울 만도 하다니까. 뭐, 게다가 지치지도 않고 한국전쟁에도 병사를 보냈고.

우리 사무실은 1784년, 정조 7년인가 8년에 설립된 곳이다. 설립 200주년 기념 책자를 읽어봤더니 1차 세계 대전 전에 이미 현재의 사이즈였다. 전쟁 때 나가서 싸울 수 있는 파트너들이 몽땅 자원해서 나가 싸우고 거개가 죽고 나머지 몇 명이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왔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끔찍한 전쟁이었다. 돌아온 파트너들이 사무실을 복구해서 다시 전쟁 전 사이즈로 회복시키려 할 즈음 또 전쟁이 터졌고 사무실의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또 몽땅 나가서 싸웠다. 정말 나이 든 파트너들은 명예는 있되 실속은 없이 가끔 화려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현재 최강자를 비웃는다: I remember those days they were only five! They were sitting just around the corner, like a kiosk! 그러면 뭐하냐. 거기 요새는 진짜 유명한 로펌이라니까.

하여간. 이래서 영국인들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도 유럽경제공동체(EEC)도 가입이 늦었다. 특유의 고립주의 및 배타성 및 자존심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국 경제난 때문에 가입 신청을 하고야 말았지만.

낯 가리고 고집 세고 체면 차리고 속마음 이야기 못 하되 까다롭고 경계도 심하고 그래도 참을 수 있는 데까지는 참고.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말도 못하고 한동안 이방인들을 다 받은 거다. 복지 혜택도 똑같이 주고, 무상으로 교육도 똑같이 제공하고. 아주 오랫동안 두드러지는 차별이라거나 혐오 범죄는 당해 본 일 없고 적어도 런던은 유럽연합(EU)의 이상을 구현해 낸 도시인가보다 하는 참이었는데.

Brexit가 터지고 바로 그 주에 백인 젊은 놈들한테 욕을 먹었다. 영국 생활 8년 만에 처음 당하는 일이다. 사무실에 가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꽤나 오랫동안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가 겨우 작년부터 여기가 편안해졌나 했더니 이런 일이 있었어, 했더니 사무실 사람들이 벌떼같이, Brexit가 일어났다고 그 idiot들이 자기들을 사람들이 지지하는 줄 안다며, 그런 일은 절대로 영국적이지British 않다며 너는 편안하게 마음 먹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아니 이 사람들아, 마음 먹는다고 그걸로 다는 아니지.....

동료인 영국인 변호사의 스페인인 와이프도 같은 일을 당했다고 한다. 의심할 바 없이 Brexit 이후에 감추어져 있던 배타성과 차별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많은 영국인들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영국인으로서 우리는 그런 꼴을 좌시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나는 참이다. 영국에서 당신들은 안전하다며, 안전핀을 옷깃에 꽂고. 감동적이지만 슬프다.



그러나 또한 우리의 시민 사회를 건네다 본다. 이만큼 한국인들은 외국인 내지 다른 민족 출신 '한국인'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차별에 민감한가. 그에 반대하고 대항해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연대와 지지를 표명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가 억울하다고 느낄 정도로 우리나라로 피신해 온 외국인을 같게 대접해 본 바 있는가.

Brexit 이후 영국에 실망하고 더 나아가 영국인들도 별수 없다는 의견을 많이 보았다. 그러게, 좀 실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멀리 갔었고 그래서 조금 지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속히 다시 체면을 찾기를, 이질감을 누르기를, 차별과 혐오를 표출하지 않기를, 다시 유쾌하고 공정하려 애쓰는 영국인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사실 또 바라지 않으면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