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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담화, 교전국과 식민지는 다르다는 우월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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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4일 발표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에는 침략, 식민지지배, 반성, 사죄라는 무라야마 담화의 4가지 키워드가 모두 들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성의를 나타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침략'에 대해서는 일본이 침략을 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제3자적인 표현으로 침략이나 전쟁과 같은 무력행사를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도 식민지 지배와 영원히 결별하고 민족자결의 권리를 존중하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고 제3자적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 일본의 주체적인 책임의식이 나타나 있지 않다. 

'반성'과 '사죄'에 대해서는 총리 자신의 직접 언급 형태가 아니라 일본이 그동안 반복해 반성과 사죄를 표명해왔다는 간접 인용의 방식을 사용했다. 그리고 반성과 사죄의 대상을 '지나간 전쟁에서 있었던 행위들'이라고 하여 무라야마 담화가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그 대상으로 분명히 명시했던 것과도 차이가 있다. 

4가지 키워드 중에서도 '사죄'를 포함시키는 문제가 마지막까지 난항을 겪었다. 아베 총리의 본심은 사죄를 넣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외적인 압력 때문에 할 수 없이 사죄라는 표현을 받아들이는 대신 '과거의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젊은 세대와 그 후손들이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자신의 보수적 색채를 부각시키려 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는 나치 시대의 일들을 해결해야 할 특별하고도 끝없는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 메르켈 독일 총리의 자세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다. 

한편, 의도적으로 국제사회의 호감을 유도하는 내용을 다수 포함시킨 것이 아베 담화의 특징이다. 감성에 호소하는 장황한 표현을 여러 군데 사용했으며,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전승국들이 관용을 보여준데 대해 깊은 감사를 표명했다. 

일본군 위안부란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인권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그늘에서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21세기는 여성의 인권이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세계를 선도하겠다고 했다. 조속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무성의하다는 국제적 이미지부터 불식시켜 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아베 담화에 대한 평가는 결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무라야마 담화를 비롯한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에 비해 선명성이 크게 후퇴되었다. 간명하고 직설적으로 식민지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밝힌 무라야마 담화에 비할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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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4일 오후 도쿄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전후 70년에 관한 역사인식을 반영한 담화(일명 아베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2015.8.14

그러나 역대 내각의 담화를 부정한 것도 아니므로 전면적으로 비난하기도 어렵다. 4가지 키워드를 포함시켰고 역대 내각의 담화를 계승한다고 분명히 밝힌 점에 대해서는 내키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베 담화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시각이다. 아베 담화는 식민지지배가 19세기의 세계적 조류였으며 일본도 그 흐름에 참여했을 뿐이라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러일전쟁이 식민지지배하에 있던 아시아.아프리카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대목에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1875년 운요호(雲揚號) 사건으로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강제병합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본은 수도 없이 군사력으로 조선을 위협해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켜 나갔다. 이러한 한일관계의 역사를 겸허히 직시하려는 자세를 아베 담화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전쟁에 의한 피해와 고통에 대해서는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면서도 식민지지배가 초래한 고통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아베 담화가 중국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그러한 내용을 거의 담고 있지 않는 배경에는 교전상대국과 식민지는 다르다는 우월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국교정상화 이래 50년 동안 한일 간의 역사인식 문제는 비록 '최선'을 실현해 내지는 못했지만 끊임없이 '차선'을 추구하며 조금씩 보완되고 진전되어 왔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에는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포함되지 못했지만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서 식민지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명문화되었고,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한국을 특정하여 언급하는 형태로 더욱 발전시켰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2010년에 발표된 간 나오토 총리 담화는 '정치적.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의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하면서 '식민지지배가 가져온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현한다'고 밝혔다. 

간 담화의 내용은 식민지지배가 불법이었다고 인정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이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진전된 것이었다. 당시는 민주당 정권이었고 오카다 가츠야 외상, 센고쿠 요시토 관방장관과 같은 뜻있는 정치인들이 핵심요직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아베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겠다고 하던 당초의 주장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점에서 '최악'은 겨우 피했을지 모르나 그 내용은 '차선'은커녕 '차악'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동안 '차선'의 형태로나마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의 조금씩 진전되어 온 흐름을 아베 담화가 처음으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에 대해서 엄중히 대처해야 할 것이다. 

아베 담화의 다음날인 8월 15일에 발표된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아베 담화의 내용에 아쉬움이 적지 않다고 원론적으로 지적하는데 그쳤을 뿐 강한 비판은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오히려 식민지지배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점을 주목한다고 하면서 올바른 역사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미래로 함께 나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지난 6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행사를 계기로 박 대통령이 우호협력관계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읽힌다. 이는 2년 반 이상이나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못할 정도로 한일관계의 경색국면이 계속되는 것이 한국 외교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복절 경축사는 비록 아베 담화가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역사인식 문제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안보, 경제 등 호혜적 분야의 협력은 적극 추진한다는 분리대응의 대일외교 기조를 계속 유지한다는 자세를 보여줬다. 

한일관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한국외교의 더 높은 상위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을 이루기 위해 일본과의 협력은 매우 긴요하며 이를 위해 한일관계를 적절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대일외교의 분리대응 기조를 유지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한일관계가 관리 국면을 넘어 본격적인 개선 국면으로 접어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는 말을 일본 정부가 행동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아베 총리가 얼마나 이에 부응할지 미지수다. 또한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합당하게 해결하라고 촉구한데 대해서도 과연 일본 정부가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낙관할 수 없다. 

한일 간의 역사인식 문제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아베 담화는 전후 70년에 즈음하여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한일관계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장차 한일 정상회담을 하게 될 경우에는 당연히 한국을 식민지지배한데 대한 아베 총리의 반성과 사죄가 초점이 될 것이다. 

최근 일본에는 한국이 끝없이 되풀이해서 사죄를 요구한다는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반성과 사죄를 요구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기 보다는, '최소한 한일관계의 4대 중요문서의 내용을 일관성 있게 견지할 것'을 요구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의 요구는 추가적인 사죄가 아니라 이미 밝힌 사죄에 어긋나는 언행을 삼가라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4대 중요문서란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파트너십 공동선언, 간 담화를 말한다. 물론 아베총리는 아직까지 한 번도 간 담화의 존재조차 공식적으로 입에 담은 적이 없을 정도로 거부감이 강하다. 그러나 앞서 소개했듯이 간 담화는 식민지지배에 대한 역사인식 가운데 가장 진전된 것이며,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므로 일본에 대해 당당하게 계승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간 담화의 존재가 한국 국내적으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이 먼저 나서서 간 담화의 성과를 지키려하지 않는다면 아베 정권은 무라야마 담화의 선명성을 퇴색시켰듯이 간 담화에 대해서도 똑같은 시도를 할 것이다.



* 이 글은 중앙SUNDAY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