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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지의 덫'에 갇힌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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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관계"라는 북유럽 어느 정치인의 말에 뭉클했던 적이 있다. 청각장애인이 많은 마을에선 구성원들이 수화를 배우면 되고, 장애인을 위해 작은 2층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상가주인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는 사회경제적 약자들 전반에 적용된다. 개인의 결핍을 관계의 문제로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복지국가를 위한 구상의 출발점이다.

신자유주의가 담론과 정치의 세계를 장악하면서, 사회경제적 차원의 절대적·상대적 박탈/결핍 정도가 심화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특히 심각하다. 가령 빈곤층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주는 빈곤갭(2014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한국이 세 번째로 높으며, 지금 추세라면 2020년 무렵엔 상위 1%의 소득이 전체소득의 15%를 웃돌면서 오이시디 최고의 불평등국가가 되리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데도 각종 통계가 보여주는 한국의 복지의지는 취약하고 한국 복지의 현실은 참담하다. 조세의 빈곤율 개선 효과와 정부 이전지출의 불평등 개선 효과는 각각 오이시디 평균의 4분의 1 수준이고 국민총생산 대비 복지관련지출에 관한 한, 한국은 오이시디에 가입한 1996년 이래 몇 해를 제외하면 내내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열악한 복지재정은 공공부문의 인적 규모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인구 1천명당 공무원 수는 오이시디 평균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최하위이고 비오이시디 국가들 평균의 절반에도 미달한다. 서구라면 유권자의 대종을 차지할 복지수혜인구와 복지업무 관련 공무원 수가 모두 취약하니 복지공약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돼도 이렇다 할 정치적 반향이 없다.

사부문의 자선실태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국민총생산 대비 한국 사회의 연간 개인기부-단속적이고 비정례적이어서 통계조차 부실한 형편이다-의 비율 0.05%(2004년)는 복지국가로 분류되지 않는 미국의 33분의 1, 영국의 15분의 1, 싱가포르의 6분의 1에 머문다. 우리는 복지'국가' 이전에 복지'사회'를 구축하는 데도 실패한 것이다.

복지의 필요성과 국가의 복지의지 간의 현격한 괴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는 반(反)복지담론들이 넘친다. 예컨대 우리는 성장보다 빈곤과 불평등을 더 심각히 체감하면서도 정부정책이 성장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성장이 분배의 전제라는 담론에 매우 친숙하다. 물론 성장은 분배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서유럽국가들이 복지국가를 발진시킨 것은 종전의 폐허 위에서였고, 오늘날의 한국에 비해 소득수준이 뒤지던 1980년대에는 국가복지 수준이 이미 완숙 단계에 들어섰다. 아마 미국이 복지국가의 반열에 들지 못한 이유를 성장의 부족 탓으로 돌릴 만큼 대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배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도 아니다. 분배는 소비수요 진작, 인적 자원의 질 향상, 사회자본의 증대를 가져와 투자, 생산성, 효율, 따라서 성장에 기여한다. 낮은 축적단계에서도 일찍이 분배에 눈을 떴던 서유럽국가들은 오늘날 가장 선진적인 국가복지체계를 만들어냈으면서도 가장 고도의 성장을 일궈냈다. 요컨대 성장과 분배는 경험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배타적 개념이 아닌 것이다.

성장 중심의 사회가 설득력을 확보하려면 재분배 장치를 위해 최소한의 제도화가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성장은 그 자체가 권력적 과정이 되고 따라서 오히려 분배의 악화를 가져오기 쉽다. 최근 선택과 다원주의의 이름으로 옹호되는 복지민영화 담론 또한 허점투성이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시장탈락자들을 화폐관계의 그물인 시장 안으로 재차 밀어 넣는, 즉 시장 실패에 대한 교정을 다시 시장에 맡기자는 자기모순적 논리에 서 있는 것으로서, 국가복지의 본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든다. 한국의 낙후된 국가복지, 척박한 민간복지전통과 만연한 반복지의식 등에 비춰 볼 때, 이 단계에서 복지를 민간에 맡기자는 것은, 복지를 아예 하지 말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복지국가란 불평등의 영역인 시장이 체제적으로 양산한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시장을 거스르는 정치', 곧 형식적 평등이 확보되는 민주주의를 통해 완화/교정해 보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가장 근본적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견제와 균형, 경제학자 케네스 갤브레이스(1908~2006)의 언어를 빌리면 "상쇄력의 제도화"에 입각해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수적 연대와 조직이 민주주의라는 장치를 통해 부에 대해 상쇄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일 터인데, 요컨대 '대표 없이 복지 없다'는 인식이다. 서유럽 복지국가가 시혜와 쟁취, 곧 보수주의와 노동정치를 두 축으로 발전했다면, 전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도 민주주의를 경유하여 복지로 구현된 것이다.

무엇보다 선진복지국가들의 발전 정도는 노동운동의 강도 순위에 대체로 조응한다. 노조조직률이 높고, 노조운동이 산업별로 연대할수록, 노동자정당의 의석지분과 집권경험이 많을수록 복지국가는 발전해 왔다. 한국이 이 모든 지표에서 서유럽국가들에 비해 비교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열악하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국가복지의 제도화' 부재란 당대의 계급 간 권력자원이 심대하게 불균등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말해줄 뿐인바, 부재란 바로 그러한 불균등한 상쇄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부재는, 방치될 때, 부재의 심화라는 악순환을 낳고 그리하여 계급권력의 편차가 커질수록 계급협력의 지형은 그만큼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한국은 시혜의 전통이나 유산도 변변치 않고, 진보정치의 역량도 말할 수 없이 취약하다. 한국 복지가 수세적 재편이 아닌 공세적으로 추진돼야 하는 이유이다. 이는 민주주의가 권력의 연원인 시장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관점에 닿거니와, 그런 관점은 오늘날처럼 재벌이 전방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정치적 민주주의마저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우리의 경우엔 더욱 절실하다.

20세기를 온전히 살아냈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그의 마지막 저서에서 "기업의 통제 없이 자본주의의 미래 없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긴 바 있다. 즉 제도화의 부재 속에서 새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복지 한국의 과제는 위계적, 권력적 영역인 시장의 문제를 복지 구상의 내부로 포괄해 냄으로써, 국가와 시장 모두에서 권력의 행사 자체를 민주적으로 규율하는 제도적 틀을 정립하는 일과 맞물린다. 가령 최근 논란이 되는 경제민주화도 출자총액제한이나 순환출자규제 혹은 금산분리 등 자본행태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규제보다는, 시장 내의 계급권력이 길항하는 제도적 틀, 무엇보다 시장의 주 행위자인 기업의 지배구조를 민주적으로 개편하는 데 그 초점이 두어져야 한다. 핵심은, 재산권이나 소유권을 하나의 다발(bundle)로 수용 혹은 폐기하기보다는 그 행사를 제한하는 시장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복지와 경제민주화는 밀접히 연결돼 있다. 기업지배구조가 권위주의적일수록 '어두운 고용'-저임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고용-이 늘고, 그럴수록 시장탈락자의 수가 증가하여 국가의 복지부담이 커지며, 이는 다시 '어두운 실업'-실업급부의 수준과 조건이 열악한 실업-의 가능성을 키우며, 시장에의 강제적 재편입, 따라서 재차 어두운 고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긴축이 시대적 구호가 되고 복지국가가 수세에 몰린 오늘날에도 서유럽 복지체제의 골격이 건재한 이유는 다양한 수준의 경제민주화가 국가복지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한국 상황이 증언하듯, 정치와 시장 모두에서 민주주의가 일상적으로 침해될수록 지적 절망과 함께 지식인들은 냉소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지니기 쉽다. 지식 중심의 보상체계가 주는 안락함도 여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릇 냉소란 모든 흔들리고 변하는 것들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가정하는 그 본질에서 반지성적이다. 우리는 어차피 잠정적 타협(modus vivendi)을 추구하며, 권력관계와 그로 인한 상쇄력의 균형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복지국가적 타협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정도로 실험되고 있는 엄연하고도 구체적인 현실이다. 한국 복지의 토양과 노동운동의 현실을 볼 때, 해결은 어차피 중장기적 전망에 있다. 그 도정이 멀고 험한 것은 사실이지만(not easy), 가야 할 길이 복잡한 것은 아니다(but simple).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