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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우 사태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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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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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말했던 것은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쉽게 다른 '종자'라며 내치는 나치 전범들도 특정의 상황적 계기가 만든 것일 뿐 실은 우리 모두 그저 운 좋게 살아온 잠재적 범죄자일지 모른다. 그래서 너나없이 우리는 변명과 회피, 비난과 책임 전가, 희생양 만들기에 그리도 분주한가 보다. 존 스타인벡의 말년 작품인 『에덴의 동쪽』은 그곳으로 추방당한 카인의 그런 후예들 얘기다. 거기에서 악은 악한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으며 가장 선해 보이는 사람들-샘 해밀턴이나 애덤 트래스크 같은-에게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낙인을 찍고 기어이 지문과 자취를 남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능하면 근본적인 질문을 잊어야 비로소 편안해지는, 딜레마의 세월을 살고 있다. 구원의 희망을 묻지 말아야 하거니와, 구원자는 우리의 달콤한 일상을 간섭하고 트집 잡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을 직시하기보다는(Memento Mori) 현재를 즐기는 쪽을 택하고는(Carpe Diem),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종래 감출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령 쇠렌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렀던 절망이요, "자유의 현기증"이라 빗댔던 그 불안이다.

불안과 안온의 일상에 갇힌 인간

〈더티 해리(Dirty Harry, 1971)〉의 지식인 판이라 할 수 있는 우디 알렌의 최근 영화 〈비합리적 인간(Irrational Man, 2015)〉에는, 칸트에서 현상학까지 모든 이론을 섭렵했지만 성적(性的) 불능에 이를 정도로 초점 없는 일상을 보내던 젊은 철학 교수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판관이 되어 자신이 악으로 규정한 현실의 한 판사를 살해함으로써, '행동'을 통해 구원을 얻었노라 으스대지만, 정작 자기 행위가 폭로될까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숭배하던 제자마저 죽이려 노심초사하는, 시정에 널린 치사한 잡배일 뿐이었다. 과연 일상의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거짓 구원자가 그의 일상을 깨버린 순간 그 자신의 파멸은 시작되고, 따르던 제자는 다시 불안과 안온이 쉼 없이 교차하는 원래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원초적 욕망에 갇힌 인간의 비극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페라다(오페라는 대부분 비극이다). 특히 베르디가 셰익스피어 원작을 무대에 올린 〈맥베스〉에선 주인공 맥베스 역에 바리톤을 세움으로써-오페라의 남자 주역은 대체로 테너 몫이다-비극적 전조를 한층 고조시킨다. 조지 오웰이 "파시스트 독재자의 중세적 변형"이라 불렀던 맥베스란 인물은, 배반, 살인, 반역의 끊임없는 공포 속에 살아가면서 시간과 더불어 잔인성을 더해 가거니와, 출세를 위해 행한 첫 번째 살인 뒤의 더 악독해진 잇단 살인들은 자기방어의 차원에서 저지른 것이었다. 아마 〈맥베스〉의 최대 매력은 일상의 본질을 주목한 데 있을 터인데, 그의 곤경은 동료들보다 조금 앞서가고 조금 더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우리 모두의 일상에 밀착해 있다. 외양은 전혀 사악하다고 볼 수 없는 인간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악한으로 화하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다짐하지만, 하나의 범죄는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진다.

권력주변을 서성이는 두꺼운 얼굴들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고 체념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에겐 악의 효과들을 최대한 줄여서 최소한의 삶의 질서를 세우고 공동체를 그나마 견딜만한 것으로 유지시킬 책임이 있다. 그래서 정치도 만들고 민주주의를 통해 타협의 단초도 열며 피차의 윤리적, 인식적 불완전성을 보완해 보려는 것 아니겠는가.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고 호언하며 시작한 정권이었다. 섬뜩하고 불길했으되 세월이 말해주려니 했었다. 그 3년여, "밴드는 없고, 트럼펫은 소리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녹음이다. 테이프다." (데이빗 린치 감독,〈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 2001〉) 정치는 저 혼자 배회하고 민주주의는 제멋대로 표류하는데, 우리 대통령은 호된 편견과 막무가내 외길만을 줄기차게 고집한다. 마름도 좋고 홍위병도 마다치 않는 저 검고 두꺼운 얼굴들 부류가 청와대건 청문회건 권력주변 어디서나 서성이는 것이 그래서 우연일 리 없다.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性)의 자유만은 누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신이 없는 쪽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카뮈의 선택은 적어도 정직했다. 피의 흔적과 냄새를 지우려고 손을 씻고 또 씻으며 "한번 저지른 일은 되돌릴 수 없구나!" 탄식하던 맥베스 부인에겐 그래도 죄의식과 양심의 고뇌가 있었다. 맥베스라고 비극적 결말을 몰랐으랴. 감히 이들과 견줄 수는 없는 일이되, 최근의 우병우 사태를 보며 띄엄띄엄 떠오른 새삼스런 생각들이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