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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짝짓기 프로 '하트 시그널'에서 드러나는 '속물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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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과 버즈피드 등의 국외 매체들도 인기의 비결을 궁금해하는〈테라스 하우스〉라는 일본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있다. 2012년부터 후지 TV에서 방송한 기획물로, 지난 시즌부터는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함께 제작해 전 세계에 배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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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하우스 : 하와이 편〉에 등장하는 출연진들. 에비앙, 유야, 로렌, 유스케, 나오미, 에릭(왼쪽부터) 사진 넷플릭스.

최근 한국 넷플릭스에 새로운 시즌 〈테라스하우스 : 하와이 편〉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생전 처음 만나는 남녀 여섯 명이 하와이의 공동 주택에서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담았다. '동거 생활'이라고 하면 애정촌 〈짝〉처럼 주말에 하루 정도 놀다 헤어지는 프로그램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간이 좀 길다. 중간에 '졸업'을 선언하고 집에서 나가면 사람이 바뀌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6개월 이상을 같이 살 수 있다.

입주 조건도 좋다. 풀장이 있는 거대한 저택과 두 대의 차량을 제공한다. 대본도 없고 재미를 위한 무리한 기획도 없다. 저녁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마음 가는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라든지, 한 달 안에 연애를 못 하면 퇴출이라든지 하는 규정도 없다. 같이 사는 걸 예쁜 영상으로 촬영할 뿐이다.

기획도 대본도 없어서 지루할 것 같지만,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의 청춘 남녀 여섯 명이 뿜어내는 호르몬은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중간중간 1주일 동안의 생활을 편집한 영상을 일본의 연예인 패널 6명이 모여 변죽을 울리며 감상평을 쏟아내는 재미도 있지만, 본격적인 재미는 역시나 테라스 하우스 6인의 생활 그 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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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하우스 : 하와이 편〉에 등장하는 패널들.

한국에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다. 지난 9월 첫 시즌을 마치고 새로운 시즌을 준비 중인 채널 A의 〈하트시그널〉이라는 프로그램이다. 공식적인 기획 이름은 '러브라인 추리게임'으로 역시나 청춘 동거가 프로그램의 주된 콘셉트다. 여섯 명의 남녀가 한 달 동안 같이 살며 정해진 시간마다 마음에 둔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매회 방송에서는 이들의 러브라인을 추론하는 '예측단' 여섯 명이 등장해 변죽을 울리는데, 러브라인을 추리한다는 것만 빼면 테라스 하우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합숙 기간 이성에게 직접적인 고백은 할 수 없다'는 등의 조건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재미는 '시그널 하우스'라 부르는 공동 숙소에서의 생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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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시그널〉의 출연진. 왼쪽부터 김세린(24), 장천(32), 배윤경(24), 서주원(23), 강성욱(32), 서지혜(21). 사진 채널A.

그러나 두 프로그램을 견주어보면, 조금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테라스 하우스 하와이 편에 출연한 이번 시즌의 최초 출연자는 여섯 명이다. 엄마가 운영하는 티셔츠 가게에서 일하는 26살의 에비앙, 하와이에서 영어를 배우고 할리우드로 건너가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18살의 유야,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18살의 로렌, 기타와 우쿨렐레 연주로 앨범까지 낸 18살의 유스케, 별다른 직업이 없는 23살의 나오미, 가구 제작자인 27살의 에릭이 주인공이다. 집과 차가 제공된다고는 해도, 먹고 살고 데이트도 해야 하니 직업이 없는 대부분의 출연자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들 중 많은 청춘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자기 자신을 설명하다.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직업의 출연자가 나오는 경우도 드물고, 학력이나 학벌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드물다. 집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 방법도 없고 묻는 사람도 없다. 이번 시즌 후반에는 29살에 할리우드 배우를 꿈꾸며 레스토랑에서 서버 아르바이트를 하는 '다이시'라는 남자가 나오는데, 그의 직업이나 불확실한 미래가 애정 선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개그맨 패널들이 야한 얘기를 쉴새 없이 떠들기는 하지만, '스펙이 좋다'는 식의 대사를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로는 '연봉이 얼마야?'라고 물었는지는 모르지만, 영상만 봤을 때는 여섯 명의 남녀들이 순수하게 테라스 하우스 안에서 서로가 보여주는 매력에 끌리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출연진들의 신상정보를 두고 여러 루머가 도는 모양이지만, 검색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하트시그널〉은 다르다. 〈하트시그널〉은 대놓고 '스펙'을 강조한다. 특히 두드러진 건 1회와 2회다. 사회자 윤종신은 출연자의 직업은 2회에서 밝힐 예정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직업을 알게 되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궁금하다." 시즌 전반에 세 명의 남자가 등장하는데, 한 명은 법무법인의 변호사(장천), 한 명은 카레이서(서주원), 한 명은 뮤지컬 배우(강성욱)다. 여성 세 명의 직업은 각각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공연 홍보 마케터(김세린), 구두 디자이너 겸 배우 지망생(배윤경), 대학생(서지혜)이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은 없고, 뭔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미 갖춘 스펙으로 승부한다. 출연자들이 몰고 온 이탈리아와 독일산 자동차를 자세히 보여주고 값비싼 손목시계와 브랜드 신발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출연진 대부분이 서울에 거주 중인 건 촬영장이 삼청동이라는 사정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출연자마다 역삼동, 삼성동, 연희동, 동대문이라며 거주 지역을 친절하게 강조하는 이유도 모호하다. 출연진 중 카레이서인 서주원이 "한국에서 프로 경기에 참여하는데 10억 원이 들고 슈마허처럼 유명한 선수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1년에 40억 원이 필요하다"고 언급했을 때 패널들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패널들은 "(카레이서라니) 태가 날 수밖에 없는 남자였어"라는 멘트를 던지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속물근성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출연진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출연진의 재력이나 직업 자체가 속물근성의 습성일 수는 없다. 다만 이를 노골적으로 과시해 보여주는 제작진의 태도는 어쩔 수 없는 속물근성을 드러낸다.

소위 말하는 '리얼리티 동거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출연자의 매력이고, 재력도 직업도 중요한 매력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매력을 강조하는 지점이 남녀 간에 다르다는 지적을 피해갈 순 없다. 30대 여성인 ㄱ씨는 "남성 출연진은 나이가 상대적으로 많고 직업과 부를 강조하는 반면 여성 출연자의 경우 어린 나이와 외모 애교 등을 매력의 요소로 보여주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30대 여성 ㄴ씨는 "21살짜리 대학생을 32살의 변호사가 벤츠로 어딘가에 데려다주는 장면을 보고 TV를 껐다"며 "이 프로그램이 어떤 관계를 강조하고 싶은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대본은 없다고 하지만, 그런 출연자를 선택한 것만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이 뭐였는지 충분히 봤다"고 밝혔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프로그램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