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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익어 인생의 와인이 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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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heads

음악도 와인이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소믈리에 : 병 안의 이야기'에는 1974년부터 DRC(도멘 드 라 로마네콩티)를 소유한 전설의 와인 메이커 '오베르 드 빌렌'이 등장해 2004년 빈티지의 에세죠를 시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그해 내내 날씨가 안 좋았지만 수확기엔 북풍이 불었고 하늘이 맑았으며 햇살이 따듯했다고 기억한다. "어려웠던 해의 와인들은 특이한 질감이 있어요. 약간 날카롭고 산도가 높아요. 축축한 숲의 향기를 머금고 있죠."

노래는 기억을 머금은 와인이다. 하나의 노래에는 그 노래를 듣던 시절의 날씨, 장소, 이야기가 담겨있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인디 밴드 팝시클의 '선키스트'(Sunkissed)라는 2분 11초짜리 8 비트 노래를 열면 나는 2002년의 여름이 생각난다. 2001년 겨울에 친구 바비(가을방학과 줄리아하트의 송라이터)가 군대에 갔다. 우리는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는데, 하루는 바비가 팝시클이라는 밴드의 노래 선키스트의 가사를 적어 보내 달라고 했다. 너무 부르고 싶은데 가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머나먼 나라 스웨덴, 스웨덴의 인디 중에서도 '상인디'인 밴드 팝시클의 가사를 찾을 수 있을 턱이 없었지만, 군대에서 팔자에도 없는 가요 무대를 보며 외로워할 친구를 생각해, 수십 번을 들어가며 영어 가사를 녹취해 보내줬다. 지금도 그 가사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난 해변에서 보낸 생각 없던 시간들이 기억나. 날아다니던 새들과 해변 보도, 아이스크림 가판대가 우리의 걸음을 멈췄지. 우리에겐 필요한 모든 게 있었고, 공기는 가솔린 냄새와 먼지로 가득 차 있었어.' 아마 난 죽을 때까지 이 노래를 잊지 못할 것이다.

'솔라 시스터'는 2008년의 여름을 담고 있다. 당시 난 밴드 '썬스트록'의 송라이터로 데뷔앨범을 내고 단독공연을 준비 중이었는데, 기타리스트(지금은 '김소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성유진 군)가 미국 인디밴드 포지스의 8비트 파워팝 'Solar sister'라는 노래를 카피하자고 들고 왔다. 그야말로 태양 같은 드라이브 톤의 기타가 쟁글 거리고 '난 너의 솔라 시스터 케리에게 전화를 할 거야. 그러나 그 말은 하지 않을래'라는 첫 가사가 등장하는 이 노래를 그해 여름 내내 들었다. '수백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노래라는 게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2009년엔 오사카에 섬머 소닉을 보러 갔다가 염천 아래 타죽을 뻔했던 게 기억난다. 너무 더워서 비욘세의 무대를 무시하고 맥주를 한 캔 사서 누가 공연 중인지도 모르고 실내를 찾아 기어들어갔다. 같이 간 친구들과 공연장 바닥에 누워 에어컨 바람을 즐기며 공연장 바닥에 누워 잠시 쉬고 있는데 귀에 익은 기타 리프가 들렸다. 무대 위에서 플레이밍 립스가 '레이스 포 더 프라이즈'(Race for the prize)를 부르고 있었다. 그 밴드 최고의 히트곡답게 무대 장치에도 힘을 썼는지, 폭죽이 터지고 거대한 풍선이 날아다녔다. 즐겨 듣는 노래는 아니지만, 어디선가 그 노래가 들리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오사카의 찌는 듯한 더위와 천사의 숨결 같았던 에어컨 바람이 생각난다.

사실 요새는 집에 오면 아내와 엘라 핏츠제랄드, 조니 미첼 그리고 콜 포터나 거쉰이 쓴 노래들을 듣는다. 아마 세월이 지나 그 노래들을 들으면 나는 홍제동 빌라의 작은 거실에서 둘이 옹기종기 맥주를 홀짝이던 밤을 떠올릴 것이다. 반면 내 20대의 여름은 온통 8비트의 파워팝(비틀스의 '플리즈 플리즈 미' 앨범처럼 팝 멜로디에 록음악 편곡을 더 한 스타일)으로 채워져 있다.

파워팝은 사춘기의 백그라운드 음악이라 아저씨의 심장으로 듣기에는 무리가 있다. 쿵딱 쿵쿵딱 또는 쿵딱쿵딱쿵딱쿵딱. 리듬은 빠르고 멜로디는 격하고 음과 음사이엔 누군가의 표현처럼 사춘기 호르몬의 냄새가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여름이 오면 혼자 운전을 할 때마다 몰래 킹크스와 틴에이지 팬클럽, 포지스와 레몬헤즈를 플레이리스트에 올리고 고성방가를 한다. 물론 창문은 꼭 닫고, 아는 사람이 볼까 두근두근해 하며.

*본 글은 여성 패션지 뮤인 8월호에 게재한 음악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