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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관점에서 본 대통령 신년사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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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년 중국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2018년 한국의 '문심조룡(文心造龍)'
- 글쓰기 관점에서 본 대통령 신년사 단상

유협(465? ~520?)이 육조 시대 제나라 원년 즈음(501~502)에 저술한 <문심조룡>(The literary mind and the carving of dragons)은 중국 선진에서 육조 시대까지의 중국 고대의 문학 현상을 시대 순으로 관찰하고 연구하여 이론으로 집대성시킨 중국 고대의 문학 이론서이다.

'문심(文心)'은 한마디로 문학창작이나 문학 감상 또는 문학비평 등의 활동을 하는 인간 마음의 전체적인 움직임, 다시 말해서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 활동을 위한 인간의 정신과 감정 및 영감의 작용을 말한다. '조룡(雕龍)'은 용을 조각하듯 문학을 구상하고 창작하는 전 과정은 세심한 주의력과 기교 등이 요구됨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재해석해 본다면, '문학 활동에 있어서의 마음의 작용과 언어문자의 예술적인 표현' 정도가 되겠다.(p.17)

문학창작은 학식에 의해서 지탱되고 창작의 능력은 천부적인 것이다. 재능은 인간의 내면에서 솟아나고 학식은 외적인 노력에 의해 완성된다. 작가 가운데는 넘칠 정도로 학식은 갖추고 있으면서도 재능이 결핍된 사람이 있고 재능은 풍부하면서도 학식이 빈약한 사람도 있다. 학식이 빈약한 사람은 묘사할 사실을 찾는 데 힘겹고 재능이 결핍된 자는 타당한 감정 표현에 힘겨워 한다. 이것은 선천적으로 내재한 것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작용의 차이인 것이다. 주역과 보좌역이 호흡을 같이 할 때 문장이 뛰어나게 되고 반대로 재능과 학식이 편협하게 되면 비록 형식은 아름답다 할지라도 성공작은 못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천재성도 중요하지만 후천적인 학습도 매우 중요하다. 풍부한 학식을 쌓아 창작 재능을 키워갈 때 비로소 성공적인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유협은 선천적인 작가의 재능과 기질 및 후천적인 학식 정도와 문장 수련의 습성에 따라 작품의 개성적인 스타일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118)

'풍(風)'이란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며, 작가의 사상과 감정 및 기질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 작가의 감정은 반드시 언어문자의 구성을 통해 외면화된다.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언어문자로의 표현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표현력이 바로 작품의 '골(骨)'이라 할 수 있다. ... '채(采)'는 미적인 언어문자 표현을 의미한다. 즉 작품의 형식미인 외적인 수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 "풍골만이 구비되고 수식이 결여된 작품은 매처럼 높이 날 수는 있으나 아름답지 못하고", "화려한 수식만 있고 풍골이 결핍된 작품은 살찐 꿩 같아서 화려하기는 하지만 높이 날지를 못한다"(152, 154, 155, 157)

유협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조화롭게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작품의 내용을 바르게 안배하여 골격을 세우는 '용법(鎔法)'과 쓸모없는 표현들을 제거하여 알맞은 표현을 이루는 '재법(裁法)'을 강구해야 한다. ... 먼저 전체적인 구조의 안배를 잘 하기 위한 '용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규칙을 세워야 한다. 먼저 표현하고자 하는 심정에 입각해서 체제를 정해야 한다. 다음은 내용에 합당한 사례들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점을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문자 표현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한 다음에 구체적인 서술로 살을 붙이고 언어문자 표현을 다듬어 가야 한다. ... '재법'은 작가의 창작 개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작품에 사용되는 표현 가운데 필요한 부분들을 첨가하거나 불필요한 부분들을 과감하게 삭제해감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빠지거나 언어표현이 중복되는 등의 폐단이 생기지 않도로 하기 위한 방법이다.(133)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문자의 구성을 바르게 정리하는 것을 '용법(鎔法)'이라 하고, 군더더기의 말을 제거하는 것을 '재법(裁法)'이라 한다. '재법'에 의해서 잡초처럼 우거진 불필요한 표현들을 제거하고 '용법'에 의해서 으뜸 되는 큰 줄거리를 분명하게 드러낸다.(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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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결혼식 주례사인지 여부는 여러 부류의 하객에 대해 얼마나 미리 신경 써 염두에 두었느냐에 달렸다. 예를 들어, 혼주 중 한 사람이 군인, 경찰, 소방공무원 등이라면 하객들 중에는 같은 직업의 동료들이 많을 것이다. 주례사에서 이렇게 음지에서 묵묵히 타인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사명감을 치하해 줄 수 있다면, 참석한 그들에게는 행복하고 뿌듯한 결혼식으로 기억된다. 결혼식 당일이 악천후라면, 주례사에서 '악천후를 뚫고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멘트가 있어야 한다. 행여 하루를 할애할 각오로 참석한 지방에서 온 하객들이 있다면, 주례사에는 악천후를 뚫고 '이렇게 멀리에서 와 주신'이라는 멘트가 추가로 더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하객들은 배려 받은 느낌이 들고, 그가 주말 하루 시간을 할애해 참석한 혼인식에 대한 애정과 노고가 보상 받은 느낌이 든다.

왕이나 임금은 용안(龍顔), 곤룡포(衮龍袍) 등 용(龍)이라는 상상의 동물에 은유된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지위는 곧잘 왕이나 임금에 비유된다. 왕이 내리는 신년교지는 얼마나 다양한 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품으려 하는지 느껴져야 한다. 대통령의 신년사도 마찬가지다. 각계각층의 국민들을 얼마나 애틋이 생각하는지 오롯이 신년사에 담겨야 한다.

맨 처음 언급한 (文心)과 조룡(雕龍)의 의미를 여기서 응용해 보자면, 대통령 신년사는 '통치활동에 있어서의 대통령의 비전vision을 제시하여 이를 언어문자로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년사의 내용 중에 나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면, 그 국민은 서운한 느낌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다.

즉, 만인지상(萬人之上)인 대통령의 신년사는 만(萬) 개의 관점에서 해부된다. 만 개의 시선들은 길고 긴 신년사 중에서 내 이야기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돋보기로 살펴본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료한 것도 중요하지만, 균형 있는 아젠다agenda 분포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신년사를 쓸 때에는 역(逆)으로 이런 체크 포인트를 뼈대로 해서 논리강약을 조절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가 '고요하고 빈 마음의 상태(虛靜)'를 유지하고 작가의 사상의식과 언어문자의 운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양 방법은 무엇일까? 유협은 개성적인 기질을 잘 다스려 키우는 것(養氣)과 풍부한 학식을 쌓는 것(積學)을 수양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113)

502년 중국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의 이 말처럼, 개인 저자라면 개인의 다양한 학식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즉 양기(養氣)하고 적학(積學)해야 한다. 그러나, 유능한 개인들을 참모로 기용할 수 있는 위치라면, 개인 스스로 양기, 적학하기 보다는 이미 양기, 적학된 다양한 전문가를 부려서 영역 별로 스크린해야 하고 또 주제별로 크로스 체킹하면 된다. 여기, 2018년의 대통령 신년사를 꼼꼼히 읽고 있는 노인이 있다. 직장 맘이 있고, 명예퇴직한 실버가 있으며, 고국에 대한 애끓는 향수를 가진 해외동포가 있다. 그들이 과연 이 번 신년사를 일독한 후 얼마나 흡족했을까. 일부는 기뻤고 일부는 서운했을 것이다. 서비스 디자인에서처럼 페르소나persona를 설정하여 이 기준에 맞추어 윤문했어야 했고 다듬었어야 했다.

후배 법조인들에게 내가 강조 하는 바 중 하나는 '모름지기 법률가라면 자신만의 헌법관(憲法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헌법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을 때, 법률가로서 법을 바라보는 성찰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 번 신년사는 개헌(改憲)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었다고 들었다. 굳이 신년사 전문(全文)을 읽은 이유는 개헌에 관한 대통령의 비전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하였듯, 읽고 난 후 나는 아쉬웠다. 헌법 전문가들의 필터링filtering과 데스킹desking을 거친 향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년사에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헌법은 국민의 삶을 담는 그릇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칼 슈미트 (C. Schmidt)보다는 루돌프 스멘트(R. Smend)의 아우라aura가 느껴지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헌법의 생활규범성 이외에 미래지향성이 담겨 있어야 하고, 동화적 통합에 대한 철학이 배어나야 한다. '촛불'이라는 현상이 과연 향후의 동화적 통합 과정에서 지켜야할 핵심 가치라 단언할 수 있을까. 이번 신년사 중 개헌의 당위성을 강조한 부분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미래지향(未來指向)의 원대한 비전 제시를 느끼기에 조금 부족했다. 개헌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야 했다면 헌법학자의 진지한 자문을 필수로 거쳐야 했다. 신년사를 최종감수한 참모진은 헌법학자들이 기(旣) 제시했을 전문의견을 최대한 존중했어야 했다. 나는 그 점이 아쉬웠다.

언론들은 달을 가리킨 대통령의 의중을 충분히 헤아리면서도 짐짓 대통령 중임제 운운의 손가락만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또한 아쉬운 부분이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도(文心)가 대통령(龍)을 만드는(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용인 대한민국(龍)을 더 멋지게 만드는(造) 데 있다고 믿고 싶다. 대한민국이라는 아시아의 용(龍)이 앞으로 승천할 그 멋진 미래의 세계를 더 잘 조각(雕龍)하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올해의 송년사, 내년의 신년사도 법률가의 한 사람으로서 매의 눈으로 열심히 읽겠다 다짐한다. 우리의 미래(未來)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게 할 슬로건(slogan)은 어디에 있을까.

정밀한 사람의 글은 요약적이지만, 재능이 없는 사람의 글도 역시 간략하다. 박식한 사람의 글은 풍족하지만 번잡한 사람의 글도 잡다하다. 논리적인 사람의 글은 명철하지만 천박한 사람의 글도 노골적이다. 심오한 사람의 글은 은밀한 데가 있지만 괴이한 사람의 글도 역시 왜곡되어 감추어진 듯 하다. 精者要約, 匱者亦鮮, 博者該贍, 蕪者亦繁, 辯者昭晰, 淺者亦露, 奧者復隱, 詭者亦曲](311).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