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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울버린, 늙어 가는 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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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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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늙지 않는 울버린, 늙어 가는 로건

엑스맨(X-men) 시리즈의 울버린(Wolverin)이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이 영화는 인생의 여러 신산을 겪은 중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관람한 후, 화려했던 소시적의 무용담이 아닌 늙어버린 자신들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 한 잔 기울이기에 적당하다. '베기'와 '썰기'가 난무하는 영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볼 만하다. 알다시피, 울버린은 재생회복의 능력을 지닌 돌연변이 투사다. 너클(knuckle)에서 튀어나오는, 아다만티움 광석으로 만든 커다란 칼날들을 휘둘러 닥치는대로 파괴한다. 심지어 늙지도 않는다. 그런 근육질이었던 불사의 울버린이 폭삭 나이들어 절뚝거리며 화면에 등장할 때부터, 중년 관람객은 몰입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의 활약을 다룬 전작 '더 울버린'의 후속편인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그의 이름을 따서 '로건(Logan)'이다. 캐릭터의 능력치보다는 그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 저 몰골, 왠지 낯설지 않은 것 같아. 나, 나인가, 내 모습일까. 그래서 이 영화는 중년이 본다면, 좀 더 애잔하게 감정이입하여 와 닿는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029년이다. 영화 속 연계된 스토리에서는 의미있는 시간대이지만, 현실 세계의 과학기술 수준에 비추어 보자면 영화 속 시간적 배경인 2029년의 소품들이 어설픈 것은 사실이다. 점원도 없고 계산대도 없는 가게라는 아마존 고(Amazon Go)가 2016년말에 등장했는데, 2029년의 극중의 편의점 알바 청년은 여전히 동네북 신세다. 애플이 야심차게 내놓은 아이폰7의 줄없는(wireless) 이어폰인 이어 팟(AirPods)은 어디가고, 치렁치렁한 이어폰 줄이 귀여운 꼬마 여주인공의 귓가에서 대롱댄다. 하지만, 그냥 이 영화는 그런 미래 기술 고증의 엉성함 - 겨우 저 정도가 10여년 후의 트럭(truck)과 드론(drone)이라구? - 들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둔채, '울버린과 로건'이라는 관점을 대비하여 생각해 볼만하다.

2. 정년퇴직의 시대, 명예퇴직의 시대

자기소개서의 직업란에 '가수(rock)'라고 적는 중년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낡은 그의 성대에서는 더 이상 스피릿을 발산하던 예전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가수라 부른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앞에 한 단어를 덧붙여 '전직 가수'라고 표기해야만 비로소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일까. 한편 정년퇴직한 회사원은 앞으로 자신의 직업을 무어라 적어야 하는 것일까. 회사원이라 적을까, 전직 회사원이라 적을까. 정년(停年)이란 단어를 한자 그대로 풀면, '머무르는 연령'이라는 뜻이다. 직장인에게 정년이라 함은, 직업인으로서 그 조직 내에서의 성장과 전진을 멈추는 시기일 것이다. 예전에는 정년퇴직의 시대라 부를 수 있었다. 조직에서의 경력기간만큼 같은 세월을 자랐던 자식들은 그새 성장하여 새로운 일가를 이루었다. 정년을 앞둔 즈음에는 이제 제 앞가림 가능한 자식들 걱정일랑 접고, 부모로서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는 수순 정도가 남는게 보통이었다. 정년 후 얼마 간의 여생을 살다가 서서히 삶을 마무리하곤 했다.

미리 저축해 둔 노후자금이든 정년까지의 노동에 따른 보상으로 주어지는 연금이든, 정년자에게 있어 노동이나 근로란 의무도 아니고 책임도 아니고 그저 선택일뿐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직장생활에서 정년퇴직이라는 단어는 이제 드문 용어가 되었다. 말하자면 명예퇴직의 시대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용기있는 결단이라는 미명으로 용퇴라는 표현도 쓴다. 가장에게 있어서 '퇴직'이란 단어는 자신의 부양의무를 더 이상 이행하기 어려운 사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므로, 절대로 피하고 싶은 것이 된다. 그래서, 다들 자신의 직장에서 정년을 맞을 수 있기를 꿈꾸기에, '정년'은 희망하고 소원하는 단어다. 테뉴어(tenure)를 받은 교수에게 보내는 박수에는 그래서 축하와 부러움이 묻어있다. 특히나 지금 같은 불경기에는 '정년이 있는' 삶이란 단어 그 자체로 안정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준다.

3. 정년이 있는 삶, 은퇴할 수 없는 삶

자연인으로서의 수명은 직업인으로서의 정년과 비슷한 무게감을 가진다. '조직'이라는 이름의, '회사'라는 이름의 세계 내에서의 수명이 곧 정년이다. 그렇다면, 정년이 없는 삶은 어떤가. 보통은 정년이 없는 삶이라는 표현은 고용안정이 보장이 되지 않는 삶을 가리킨다. 가동연한 동안 불사의 직장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직업인들은 전성기가 언제이고 쇠퇴기가 언제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상향평준화된 교육수준때문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발달된 과학기술 탓에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당하는, 늘어나는 경쟁자의 숫자로 인해 희소성을 점차 잃어가는, 직업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여건의 변화때문에, 전성기와 쇠퇴기의 기준이 과거와 달라졌고, 각자의 대비책도 달라졌다.

하지만 거꾸로, 정년이 없는 삶은 '은퇴할 수 없는 삶'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앞서 가수의 예를 들었던 것처럼, 죽을 때까지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은퇴할 수 없는 직업도 있다. 특히, 라이센스(license)를 획득하면 비로소 가지게 되는 유형의 직업들은 일정 연령에 도달하더라도 그 자격증을 취소하지 않는한 계속 그 직업을 보유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 직업인은 정년이 없는 셈이다. 그만 두고 싶지만, 그만 두지 못한다. 살아 있는 한 임의로 그 자격증의 사정거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 자격증에 따르는 법적, 도의적 의무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격을 보유한 기간이 길어져 '원로'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면, 그 이름은 그 권위만큼이나 무거운 의무를 지운다.

4. 직업인 울버린, 자연인 로건

불로(不老)하는 바람에 불로(不勞)할 수 없게 된다면, 이는 해당 직업군의 원로로서 그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명예롭게 마감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하는 것은 때로 슬픈 일이다. 정년이 보장되었던, 자격증이라는 철밥통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의 많은 울버린들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의 성장 앞에서 은퇴와 정년 불확실의 로건으로 변한다. 이제 어느 사회의 어느 조직에서든 불사의 울버린은 없다. 불안한 로건만이 있을 뿐이다. 전작에서의 직업인 울버린은 후속작인 이 영화에서 자연인 로건이 되어 다가왔다. 울버린이 이 영화에서 처한 삶은, 비로소 죽을 수 있게 되는 삶, 자의든 타의든 끝이 존재하는 삶,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서 그만 두겠다는 의지가 겹치는 삶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선, 우리 모두 로건이다. 대부분의 역사는 울버린으로서의 시절의 삶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존경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는 로건으로서의 시절의 삶에 달려있다. 액션 속에 부성애, 모성애, 멘토멘티 등 여러 관계들의 상징장치를 엮어서 심어 놓은 이 영화에서, 나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명예를 마감하기로 결정짓는 직업인의 모습을 찾았다. 어차피 모든 울버린은 언젠가 로건이 된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