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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 이야기 | 두 나라는 왜 서로 다른 소녀상을 갖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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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을 며칠 앞둔 지난 화요일, 미국 뉴욕의 금융가인 월스트리트에는 자그마한 소녀의 동상이 등장했다.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SSGA)라는 투자자문회사가 홍보에이전시인 맥캔 뉴욕과 조각가 크리스틴 비스벌에게 의뢰해서 진행한 조각으로, 뉴욕시로부터는 일주일 동안 세워둘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쏟아내고도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와 그 트럼프 정권 하에서 고삐가 풀린 자본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여성의 날 행사에 맞춰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상 바로 앞에 설치된 소녀상은 등장하자마자 시민과 언론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겁없는 소녀(The Fearless Girl)'라는 이름의 이 소녀가 노려보고 있는 황소상도 1980년대 말에 불쑥 등장했다가 시민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영구적으로 남을 수 있도록 뉴욕시가 허가해 준 만큼, 이 소녀상 역시 계속 남아 뉴욕의 명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많다.

당차고 발랄해 보이는 이 소녀상을 보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위안부 소녀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단순히 두 경우 모두 주인공이 소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단체들이 이번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살아 있는 소녀상' 행사를 세계 곳곳에서 열었을 만큼 위안부 소녀상은 한국이 여성의 인권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이다.

girl statue wall street

선 아이, 앉은 아이

겁없는 소녀상과 위안부 소녀상을 비교해보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차이는 한 아이는 서 있고 다른 아이는 앉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체적인 자세의 차이가 아니다. 겁없는 소녀는 팔을 허리에 올리고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두 발을 넓게 벌린 채 '물러서지 않겠다'는 바디랭귀지를 전달하고 있다. 사람도 싸움을 앞두고 있을 때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으로 몸을 크게 보이는 자세를 취하는데, 이 아이의 자세가 바로 그렇다.

위안부 소녀상은 다르다. 바라보는 대상을 조용히 바라볼 뿐, 도발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다. 누군가 "(소녀상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능욕하기 너무 쉽게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이해가 간다. 가끔 인터넷에 등장하는 위안부 소녀상을 모욕하는 사진들을 보면, 변태적인 동기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수동적인 위안부 소녀의 자세가 겁없는 소녀에 비해 훨씬 쉬운 상대일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위안부 소녀상이 희생자(victim)를 묘사하고 있고, 겁없는 아이는 저항(defiance)을 상징하고 있다는 차이에서 온다. 나는 전자가 남성 조각가에 의해서, 후자가 여성 조각가에 의해서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위안부 소녀상은 부부 조각가의 공동작품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 "순결한 소녀/여인을 일제가 더럽혔다"는 내러티브에 빠지는 것에 대한 지적은 자주 있어왔는데, 이는 한국에서 위안부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담론에서 주된 화자가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들이 자신의 소유물인 여성을 외세에 뺏겼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반성의 시각이 밑에 깔려있을 때, 여성은 여전히 객체에 머무른다.

girl statue seoul

여성의 시각, 남성의 시각

나는 위안부 소녀상을 제작한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훌륭한 공헌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그들의 작품으로 얼마나 많은 논의가 촉발되었는가. 나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 어떤 정치인이나 관료보다 중요한 일을 했다고 본다), 그가 위안부 소녀상을 이야기하는 인터뷰에서 논개를 언급한 것은 (그것이 비록 국가를 위한 논개의 희생이라는 맥락이라고 해도) 여전히 일본이라는 침략자들이 한국 여성을 "능욕"한 것이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는 남성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의 시각에서 볼 때 위안부 소녀는 '우리가 지켜주지 못한 순결함'이고, 위안부 소녀상에 가장 강조된 것도 그 부분이다. 물론 그것도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의 시각이며, 그 표현은 여성의 목소리여야 맞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데서 출발한 위안부 문제를 또 다른 (희생자의) 대상화를 통해 지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쉽다.

형태적으로만 보면 위안부 소녀상과 월스트리트의 겁없는 소녀 모두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전자는 일본대사관을 보도록, 후자는 황소상을 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하지만, 조금만 들어가 보면 그렇지 않다. 위안부 소녀상은 봐야 할, 보여져야 할 아이를 디자인한 조각이다. 일본대사관,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이 소녀를 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인들이 보고, 불쌍하게 느끼고, 참회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 소녀상은 전세계 어느 도시에 놓여져도 보여지는 수동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와 반대로 겁없는 소녀는 노려보는 주체로 존재한다. 황소를 노려보고, 월스트리트와 포춘500 대기업들을 노려보면서 여성임원을 더 많이 뽑으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주체이고, 나는 내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stand my ground)는 자세를 갖고 있다.

과거, 미래

사실 두 작품은 여성이 사회로부터 받은 불이익에 대한 항거라는 문제의식만 공유했을 뿐 접근법과 제작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위안부 소녀상은 그 문제를 절감한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사회단체를 찾아가 작업을 제안했고, 겁없는 소녀상은 유명 광고 에이전시의 주도하에 조각가에게 돈을 주고 커미션을 맡겼다.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 위안부 소녀상은 과거에 관한 작품이고, 겁없는 소녀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조각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조각은 상이한 역사를 가진 두 사회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위안부 소녀상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아픈 역사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희생자로 객체화된 여자아이의 모습 때문이다. 그것은 성폭행 당한 여성이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와도 다르지 않다. 많은 여성들에게는 성폭행 당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 자체보다 영원히 "성폭행 당한 희생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순간, 자신은 힘이 있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다른 성(性)에 의해 규정되는 힘없는 객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여성이 주체가 되고, 피해자가 힘있는(empowered) 주체가 되는 방향으로 바뀔 때가 되었다. 위안부의 문제는 과거에 관한 것이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한국에 사는 여성의 미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Deepr에 게재된 글입니다.

  • Brendan McDermid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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