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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에 사는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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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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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경험'은 6~7살 즈음이었다. 군것질을 좋아했던 나는 집에서 3~4분 남짓의 '해태슈퍼'라는 곳을 다녀오던 중이었는데, 평화로운 오후의 골목길에서, 갑자기 정말 전혀 모르는 남자가 내 옆에 다가왔다. (아마 10~20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튼 나보다 무척 컸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내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엉덩이에 손을 댄 채, 주물럭거렸던 것은 아니고 정말 가만히 손만 댄 채, 계속 같이 걸었다. 그렇게 골목 끝에서 끝까지 걸어갔고, 남자는 유유히 사라졌다. 도대체 왜? 이게 뭐야? 어린 나이였지만, 온몸을 얼어붙게 만든 모욕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입고 있었던 청치마, 아무도 없었던 골목길의 회색 풍경도 기억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흐릿해질지언정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자라 가슴도 생길 즈음에는 친척 남자애가 찝쩍거렸다. "OO야" 내 이름을 부르며 분명 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쓰윽 앞으로 손을 내려 가슴을 만지고 난 다음, 다시 자기 할 일을 하는 식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친척 여자애한테도 똑같이 그랬다. 가슴에서 분노가 차올라 외할머니에게 일렀지만 '걔는 가여운 애다' '너희들이 이해해라'고만 하셨다. (그 남자애는 아빠의 가정폭력/부모님의 이혼 등으로 외할머니가 키우다시피 하셨다. 10대 초반의 여자애들에게 성적 모욕감을 선사한 그 아이는 외할머니에게 그저 '가여운 손주'였다)

그 나이 전후로 해서, 다른 성범죄도 겪었지만, 이건 지금도 입 밖으로 꺼내기 괴로운 일이라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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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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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선명한 기억은 고3 때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공부를 무척이나 무식하고 엉망진창으로 시키는 곳이었다. 자정까지 공부를 하다(그냥 학교 의자에 앉아있다가) 새벽 1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대중교통이 끊겼으니 비슷한 동네 사는 애들 부모님이 번갈아가며 학교에서 각자의 집으로 실어날라 주셨다. 바로 집 앞은 아니고 집 근처까지 실어다 주면, 우리가 알아서 집에 가는 식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바로 그 공포의 사건이 벌어졌다. 부모님은 24시간으로 돌아가는 가게를 운영하느라 무척 바쁘셨는데, 그날따라 나를 데리러 나와야 하는 역할을 맡은 아빠가 나타나지 않았다. 피곤해서 잠에 빠져들었던 모양인지 전화도 받지 않았다. 20분 정도 더 걸어가야 하는 골목길의 검은 어둠이 블랙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둠을 통과해야 집에 도착하니까. '설마 별일 없겠지' 터덜터덜 걸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무리의 남고생들이 수근수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혼자 있나 봐' '쉿 조용히 좀 해봐' .....

그러니까, 시간은 칠흑 같은 새벽 1시였고, 길에는 사람은커녕 개 한 마리도 없었으며, 남고생 5,6명이 여고생 한 명을 따라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손발이 떨리는 경험을 그때 처음 했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봤자 경찰이 도착하면 이미 늦을 것이고, 당장 대문이 열린 아무 집으로나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도망가는 것보다 남고생들의 행동이 빨랐다.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남고생들은 내 교복 치마를 걷어 올렸고, 내 허벅지에 뭔가를 묻혔고,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냅다 달아났다. 내 허벅지에 묻은 것이 정액이라는 건, 집에 와서 눈물범벅으로 몸을 씻으면서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더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다)

그다음 해에는 길 가던 할아버지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대학교 1학년 여름을 앞둔 중간고사 기간, 나는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시험 시간을 놓칠까 봐 청명한 가로숫길을 빠른 속도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걸어오던 할아버지가 자꾸 나를 보며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이었다. 좀 더 거리가 가까워져 "할아버지,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라고 말을 건넨 순간, 할아버지가 내 가슴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 정확한 워딩은 이것이다.

"아이고, 아가씨 X통이 크네. X통이 커"

나는 그 자리에서 동상이 되고 말았다. 큰 충격과 모멸감에 (시험 시간이 가까워졌는데도) 5분 넘게 움직이지 못한 채, 저 멀리 할아버지가 점으로 사라지는 모습만 고개를 돌려 지켜보았다. 한창 꾸밀 20대 시절 내가 최대한 몸매가 드러나지 않도록 'XL' 사이즈의 티셔츠를 입고 다닌 이유다.

그 후로도 참 많았다. 미처 다 나열할 수가 없다. 집 안에서, 골목길에서, 지나가다가, 거나해진 술자리에서, 아니 그냥 점심때 밥을 먹고 있는 도중에도 겪었다. 진짜 아무 생각 없는 놈도 있었고, 자기가 의식 꽤나 있는 줄 아는 놈도 술 취하면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 후배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모 선배(?)도 술에 취하면 여자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내가 그냥 재수가 옴 붙은 거였을까? 글쎄. 여성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이런 경험이 전혀 없는 여자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길에서 잠깐 팔을 들어 올려 머리를 매만지던 순간 뒤에서 어떤 남자가 양손으로 가슴을 만졌다고 했고, 한 친구는 하굣길 버스 안에서 양복 입은 직장인이 정액을 교복 치마 뒤에 묻혀놓아 엄마가 빨아주었다고도 했다. 공개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잘 하지 않았을 뿐,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기억들에 몸서리치면서도, 분노를 가슴에 꼭꼭 눌러두며 산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미리 조심하게 되는 습관들, 공중 화장실에 갈 때마다 수상쩍은 구멍을 모조리 확인한 뒤 볼일 보기, 날마다 터져 나오는 '여성살해' '여성 대상 성범죄' 기사-그리고 거기에 딸려오는 '왜 남자 여자 편 가르냐' 등 무수한 비난 댓글들을 볼 때 느끼는 거대한 절벽. 숨이 목구멍까지 턱 막혀오는 이 두려움을 아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여성들은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강남 살인사건을 접한 후,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이런저런 일들이 떠올라, 지난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여성이 분명 나뿐만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