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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차 탈핵운동가의 미안하지 않은 휴가 | 휴식이 필요한지 이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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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사진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대학생회 멤버로 반핵운동을 시작하여 20년이 넘도록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꽤 오랫동안 휴식 없이 살았다. 신혼여행지에서도 성명서를 쓰던 내가, 아이가 태어난 뒤 삶의 '쉼표'가 절실하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야근하고 뒤풀이 술로 피로를 달래던 나날들

1995년에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부터 '반핵운동'을 시작했다. 1997년 1월 15일 환경운동연합에 정식 간사로 들어갔다. 그전까지는 대학생회 멤버로 활동했다. 대학교를 다닐 때나 환경운동연합 활동가일 때 휴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할 일을 놔두고 휴가를 가는 건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해서 놀더라도 사무실에 있는 게 편했다.

그때 휴식은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술 한잔하는 거였다. 휴가란 전날 과음하여 다음날 일을 제대로 못 하고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의 매일 늦게까지 야근이었고 야근 뒤엔 항상 뒤풀이가 있었다. 아침엔 늘 지각이었다. 쌍방이 한바탕 몸싸움을 하는 시위와 함께 거리투쟁(가투)이 있던 날은 무리하게 힘을 쓴 탓에 여기저기 욱씬거리는 몸을 술과 노래로 달랬다.

그나마 몸을 돌보면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게 된 건 그 시대에 학생운동가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휴가, 구치소에서의 시간이었다. 내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 1997년 7월 영흥도 석탄화력발전소 반대 행사에 참석하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온 날부터 의도치 않은 휴가가 시작되었다. 서울 장안동 대공분실에서 아침 댓바람에 나를 잡으러 들이닥쳤다. 학생운동 시절 환경위원장으로 활동한 단체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거다. 대공분실과 경찰소 유치장에서 며칠을 보낸 뒤,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 1심 선고가 있기까지 석 달간은 처음으로 나를 위한 휴식의 시간을 가진 날들이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두고 구속되어 있으니....

집행유예로 나온 뒤에는 전과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었다. 과로, 과음, 출장.... 운동 분야와 동떨어진 책, 수필이나 시 등을 읽어 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나마 해마다 발표되던 이상문학상 수상집이나 정호승 시인의 시집 정도가 거의 유일했던 것 같다. 중학생 때까지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고등학교 입시체체로 들어가면서는 국어 공부를 위해 읽어야 하는 책조차도 손이 가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세미나를 위한 사회과학서적에 진절머리가 났다. 핵발전소와 에너지 정책에 관련된 책도 읽기 싫었다. 일을 위해서 관련된 전문서적을 겨우 읽는 정도였다.

그래서 내겐 휴가도 책도 낯설었다. 신혼여행지에서 첫날 아침은 성명서를 쓰는 것으로 시작했다. 여행지에서도 걸려 오는 전화를 계속 받았고 심지어 라디오 인터뷰도 했다. 여름휴가원을 낸다는 것도 역시나 낯설었다. 여름휴가를 가겠다고 휴가원을 낸 건 아마도 아이가 태어난 뒤였던 것 같다. 임신했을 때조차 휴가를 가지 못했다. 아이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난 해인 2011년 6월 5일 아침에 태어났다. 나는 6월 4일 오전까지 일을 했고 진통이 시작되자 그제야 출산을 위한 준비물로 무엇이 필요한지 챙기기 시작했으며 만삭 사진도 그때서야 찍었다.

삶의 쉼표가 느니 사랑하는 사람이 늘었다

결혼하고도 바뀌지 않았던 생활이 아이를 낳고 나서야 바뀌었다. 물론 그때도 아이 젖을 물리면서 보고서를 쓰는 때가 있었고, 지금도 아이가 옆에 있을 때 가끔 휴대전화로 SNS를 확인하거나 통화를 하다가 "엄마, 또 핸드폰 보고 있지!"라는 타박을 받기는 하지만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거의 매일이었던 야근과 회식이 사라졌다.

50개월까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동안 술은 자연스럽게 끊었다. 젖을 끊은 후로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두 달에 한 번 꼴도 안 된다.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바로 직행이다. 아이가 자기 전까지 아이하고만 있는다. 가끔 일이나 회의 때문에 아이 아빠에게 또는 우리 엄마(아이 외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하지만 주말은 아이를 위한 시간으로 정해 두었다. 주말마다 아이와 함께 종로문화센터에 간다. 수영을 하고 발레 수업을 같이 한다. 아이가 블록 놀이를 몇 시간 하는 경우에는 옆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아주 예외적으로 영덕 주민투표 지원 때문에 거의 두 달간을 영덕에서 지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아이를 만나러 서울에 들렀다.

여름에는 휴양지로 휴가를 간다. 싼값에 성수기를 비켜 가면 전화가 오는 통에 결국 일을 연장하게 되어 이제는 좀 비싸게 비용을 내더라도 남들 휴가 갈 때 같이 가려고 한다. 써야 할 글이나 일이 있어서 주말 내내 그 일을 해야겠다고 노트북을 들었다 놓았다 하지만 결국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해치우는 게 대부분이다. 주말엔 가족과 함께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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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비용을 아끼려 성수기를 피해 여행을 가 보았지만, 자꾸 전화가 오는 통에 일에서 벗어나지 못해 낭패였다. 이제는 남들이 가는 휴가철에 같이 휴가를 내어 온전히 가족에게만 집중하고는 한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면서 취미생활이 하나 늘었다. 학교 기숙사를 들어가든지, 유학을 가든지, 어느 공간을 갈 때나 화분 한두 개씩을 꼭 가지고 다녔는데, 그게 모여 어느덧 수십 개가 되었다. 그리고 집 앞에 텃밭을 가꾼다. 상추가 너무나 많이 자라서 먹지 못하고 주변에 나누어 주는 한이 있어도 키운다. 상추, 깻잎, 토마토, 가지, 샐러리, 호박, 오이, 딸기, 옥수수....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이들을 돌보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바뀌었다. 삶의 쉼표가 늘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을까. 예전보다 글 쓰는 속도가 빨라졌다. 지금은 야근은 거의 안 하는데 일의 양은 더 늘었다. 2003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날 저녁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성명서 하나를 못 쓰고 낑낑거렸다. 정신과 머리가 메마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성질이 고약해서 잘 싸웠다. 길 가던 청년들과 주먹다짐도 했다. 비난하는 데 익숙했다. 적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게 쉬웠다. 상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타도할 대상은 정부 관계자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수두룩했다.

그런데 이제는 비난을 잘 못 하겠다. 욕도 잘 못 하겠다. 심지어 공청회 단상 점거도 잘 못 하겠다. 그들이 왜 그런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얘기를 좀 더 하고 싶다. 얘기를 좀 더 듣고 싶다. 읽고 싶은 책이 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늘었다. 그게 꼭 내 인생의 쉼표가 늘어서일까? 글쎄,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다. 이 싸움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고, 나도, 우리도 책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도 좀 더 명확히 보여서일 거다. 그런 눈이 트이는 데 가족과 휴식이 한몫했다는 걸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올해는 내게 주어진 휴가를 전부 다 쓰겠다고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지난 20년 동안 어느 한 해도 휴가를 다 쓰지 못했다. 지금은 근속연수가 오래되어 연차휴가만 24일이나 된다. 올 여름은 2주간 휴가를 냈다. 남은 휴가 역시도 연말까지 다 쓸 거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가족이 생기고 나서야 뒤늦게 휴식의 의미를 찾았다. 시대 영향도 있겠고 개인 경험 차이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이제야 사회운동가에게도 휴식은 필수적이고 누구에게 미안해할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양이원영 님은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환경운동연합 탈핵에너지팀 처장으로 일하며 핵발전소 없는 사회, 더 안전하고 차별과 소외 없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살림이야기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