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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없는 하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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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랑 딸은 얼마나 자주 만나? 이제 네 살인데 예전보다 아빠를 더 찾지 않아?" "딸이 돌도 되기 전부터 별거했으니까 특별히 아빠에 대한 애착이 큰 것 같진 않아. 한 달에 한 번 만나는데 약간 친척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너무했다. 애들이 부성애를 충분히 느껴야 바르게 성장한다잖아." "가족의 형태는 다양한 건데 꼭 아빠가 있어야 할까? 어떤 모습의 가족이든 구성원들에게 충분히 사랑받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도 아빠가 있어야...."

눈앞의 인간이 '친한 언니'에서 '친했던 언니'로 바뀌려는 순간, 동정심에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하이에나로 보였다. 불행의 냄새를 맡고 다가온 동물이 죽은 살점을 뜯어 제 배를 채우려 하고 있었다. 집요하게 부성의 부재를 캐묻는 그녀의 태도를 도저히 좋게 해석할 수 없었다. 테이블 위의 냉면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뭘 찾는지 알겠지만 번지수가 틀렸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고 냉면에 겨자를 쏟아부었다. 부성애의 중요성을 연설하던 그녀는 난데없이 '싱글맘의 위대함'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육아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고무줄 같은 냉면을 씹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제는 다시 '아빠 없는 슬픔'으로 바뀌고 말았고 짜증을 견디지 못한 나는 젓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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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야. 아이와 남편을 너무 사랑하고 가정을 지키는 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믿고 있겠지. 나는 언니랑 달라. 이기적이라고 매도해도 좋아. 어쩌면 딸보다 내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혼했는지도 몰라. 후회는 안 해. 이혼 안 했으면 매일 싸우는 부모, 미쳐가는 엄마 모습이나 보여줬을 테니까. 명랑한 내 딸이 나중에 아빠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건 언니 같은 사람들 때문일 거야. 너 슬프지? 슬프지 않니? 분명히 슬플 거야, 그렇게 강요하고 있잖아. 무엇이 결핍되었나 구경하고 싶어 하잖아. 내 딸이 전남편과 맺는 관계가 어떨지 나도 몰라. 그저 둘만의 답을 찾길 바랄 뿐이고 그건 이혼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러니 제발, 이혼이 세계의 종말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지 마. 누군가에겐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거든."

기관총처럼 난사한 나의 말. 전운이 감도는 침묵을 깨고 그녀가 나를 향해 웅얼거렸다. "슬픈 건 나야. 나 같은 사람도 이혼할 수 있을까? 아이가 아빠를 엄청 좋아하는데...." 험악한 대화를 예상했던 나는 의외의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시종일관 '아빠'를 입에 올렸던 속내를 알게 되자 미안해졌다. "신파라는 장르는 이미 예전에 끝났잖아. 나는 이혼이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고 생각해." 탐탁지 못한 나의 대답을 음미하던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예전부터, 사실은, 우리 또 만나자, 내 마음이, 애 아빠가.... 그녀가 숙제처럼 남기고 간 토막 난 말들. 오해와 적개심이 쫓겨난 자리에 홀로 선 나는 신파 속 아역처럼 훌쩍거렸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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