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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공주 혹은 소피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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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가상의 왕국 인첸시아, 엄마와 왕의 재혼으로 갑자기 공주가 된 소녀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소피아. 미취학 아동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주제와 인물들을 뒤범벅한 판타지 만화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모험을 통해 성장하는 공주의 이야기다. 내가 보기엔 소피아는 어린이라기보다 성인군자나 슈퍼 히어로에 가깝다. 그야말로 환상 속 어린이다. 주어진 환경에 빠른 속도로 적응하며 갖은 난관을 웃음과 지혜로 극복하고 새로 획득한 계급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즐겁게 해결한다. 최근 개봉한 디즈니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소피아 공주 역시 매우 진취적이고 용감하다. 심지어 고정된 성역할과 공주 이미지에 집착하는 의붓 자매 앰버의 의식화에 큰 역할을 하며 작은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드레스와 티아라의 구속은 여전하다. 텔레비전 시리즈물이라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보다는 보수적이나 가혹한 평가를 내릴 만한 수준은 벗어났다. 제 나름의 장점도 많이 갖고 있다. 장사 잘되는 공주 산업을 등질 수는 없고 시대에 역행할 수도 없는 디즈니의 고민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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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유해할 것 없는 만화라는 것이 나의 결론인데 어째 딸과 함께 볼 때마다 고군분투하는 소피아가 마냥 안쓰럽다. 진정한 공주가 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소위 지덕체의 조화, 내면과 외면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만화 속 공주들의 외모를 보라) 늘 타인의 마음을 배려하며 자신의 욕망을 조율해야 한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되 기존 질서에 안전하게 저항하여 구성원들의 합의나 호감을 얻어야 한다. 남의 죄는 기꺼이 뒤집어쓰되 자신의 성취에 대해 절대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 전력을 다해 삐딱한 내가 보기에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에 나온 현대판 공주의 미덕이란 여성을 향해 예쁘게 설치된 덫에 가깝다. 교묘히 업그레이드 된 억압이랄까.

뿌연 하늘의 서울. 딸을 데리고 쇼핑몰에 숨어 서성이다 보면 많은 소피아 공주들을 만나게 된다. 공주가 아닌 엄마의 이름으로, 반짝이는 드레스가 아닌 유모차를 끌며 배회한다. 남의 왕국에 서서 마법 풀린 물건들을 살피며 끊임없는 자기 단속을 한다. '공주님들! 주중엔 열성적으로 업무 보셨나요? 이제 모두를 위해 희생, 봉사, 사랑하는 주말 되세요. 명심해요. 욕망이 끓으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용기가 지나치면 갈등이 된답니다.' 설레는 모험은 스케줄에 없다. 한때의 주제가, 심장을 관통하던 노래도 잃은 공주들은 책임감을 티아라처럼 쓰고 있다. 아이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 허둥대던 나는 엄마들을 자세히 살폈다. 우리 중 누가 이 삶을 찢고 뛰쳐나갈까. 모두를 충족시키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고 공주 아닌 자신만의 이름 걸고 인생을 살아갈까.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의 원제는 '소피아 1세'(Sofia the first). '너 정말 해낼 수 있어?' 딸의 운동화에 인쇄된 소피아는 밝게 웃는데 내 머릿속엔 그저 '쩜쩜쩜'... 보라색 말줄임표만 길게 늘어섰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