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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난슬 Headshot

청와대의, 고양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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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굶주린 발자국을 쫓다 보면 어느새 후미지고 어두운 곳에 도착하게 된다. 학대받고, 잊히는 것이 마땅한 존재는 세상에 없는데도, 살다보면 자꾸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슬퍼진다.

9년 전, 멸치육수를 내던 날. 나는 집 앞에서 목격한 고양이들의 올망졸망한 얼굴을 떠올렸다. 축축한 멸치를 들고 나가니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미와 아기 고양이들이 집 앞 화단에 앉아 있었다. 반갑고도 신기하여 멸치를 내주고 먹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어미 고양이는 나를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배를 채우는 자식들 곁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눈을 바라보며 '앞으로도 잘 부탁해.' 기습적으로 사랑의 씨앗을 내 마음에 던졌다. '이제 당신도 우리를 알게 될 거야. 반드시 좋아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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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사랑에 빠지면 고양이를 모르던 이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처음으로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멸치를 먹였던 날,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대형 고양이 사료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뒤로 3년간 계속 캣맘으로 살았다. 이십대 후반, 분명 연애도 하고 그림도 그렸으며 음악을 시작해보겠다고 아등바등했는데도 그 시절을 압축해서 한 단어로 설명하라고 하면 나는 '캣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길고양이들에 대한 추억이 연애의 흔적보다 강렬하다.

처음엔 아무나 먹으라고 내놓은 사료였는데 점차로 누가 먹는지 알게 되었다. 자주 마주치는 아이들과 돈독한 관계(물론 나만의 생각이다)가 형성되어 책임감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밥을 주던 구역의 사랑스러운 부부 고양이, 온몸에 흉터가 가득한 '보스', 서교초등학교의 '야옹 닌자'들, 필시 누가 유기했음이 분명한 '고등어', 독실한 '성당 고양이'를 알게 되니, 점점 그들이 나의 이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들을 '몰래 이웃'이라고 불렀다. 사람들 몰래 골목에서 피고 지는 생명이 너무 사랑스럽고 가여웠다.

오래 살지도 못하는 길고양이들을 쥐약으로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주민과 다투거나 '해충 같은 것들에게 왜 밥을 주냐' 눈을 흘기는 인간 이웃을 만날 때면, 양손 가득 고양이 사료를 든 채 분노의 산책을 했다. 오해받는 짐승들을 지켜주기엔 나의 인성이 부족했다. 길고양이들 덕분에 행복하면서도, 사람들 때문에 괴로웠다. 이사를 하며 아이들과 작별할 때, 나는 무거운 책무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과 동시에 쓰라린 죄책감을 느꼈다. 골목 전체를 유기하는 기분이 들었고 다시는 캣맘으로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난주 일요일, 고양이 찡찡이(한때 유기묘였다고 한다)가 청와대에 입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혼자 오두방정을 떨며 기뻐했다. 찡찡이의 등장이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품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우리들의 삶이 바뀌길 간절히 원하는 만큼, 스치듯 짧은 생을 살다 가는 길 위의 생명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생기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찡찡이가 상징하는 것...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기대를 접고 싶지 않다. 변화에 대한 갈망이 마음에 넘실거린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