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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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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까칠하게 신경이 곤두선 날, 나는 상상한다. '엄마와 5분 이상 대화하면 싸우는 딸들의 모임'이 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까. 잘 키워 준 부모에게 고마운 줄 알아라, 나이 들면 이해한다, 살아 계실 때 잘해라, 비난이 날아들지 않는 곳에서 또박또박 하고 싶은 말. 돼먹지 못한 불효녀의 대사는 어떤 내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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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있어 엄마는... 검열관이에요. 열한 살 때인가. 일기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다시 꺼내 보았는데 일기장 속 친구들, 가족들 이름이 까맣게 지워져 있었어요. 엄마가 펜으로 열심히 지운 거죠. 누군가 쓰레기통을 뒤져 제 일기를 읽을까 봐 그런 것 같아요. 물론 제 일기장엔 국가기밀도 없고 수치스러운 가정사도 없었어요. 평범하고 시시한 이야기만 가득했죠. 조용히 제 일기장을 꺼내 이름들을 지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에 놓은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어요. '내가 뭘 잘못했나' 수치심이 들고 숨이 막혔어요.

그때의 일이 뇌리에 박혀서 지금도 가슴이 후끈거릴 때가 있어요. 엄마와 저의 갈등을 유발하는 일들은 늘 비슷한 패턴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밀착 단속과 통제. 불안감의 상속. 저의 안전을 위한 양육법이었다지만 엄마가 정말 사랑하고 보호하고 싶었던 것은 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을 거에요. 제게 절실했던 것은 자율성과 신뢰였어요. 저를 믿어주는 일은 엄마에게 너무 어려웠나 봐요. 혹은 두려웠겠죠.

참다못한 제가 '불효녀 선언(나는 나쁜 딸 맞아)'을 하자 대대적인 모녀 전쟁이 시작되었죠. 엄마와 크게 싸운 뒤 사과를 받았지만 원망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알아요. 저 정말 한심하죠. 서른일곱이나 되었는데 옛날 일로 화를 내다니. 아이가 생기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던데 아직도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더 힘든 건지도 모르겠어요. 오히려 제 딸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를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분노가 되살아나요.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면 혼자 할 수 있게 놔 둬!' 자꾸 강조하게 되죠. 딸이 아닌 어린 시절의 나를 위해 엄마와 싸우는 느낌이에요. 심리학 책을 보면 부모와의 정서적 탯줄을 끊지 못하는 것이 제일 문제라고 하더군요. 과거에 묶여있는 제 탓이 크죠. 서로의 감정을 제대로 분리하지 못하니 불화는 계속되고 있어요. 엄마 말대로, 제 성격이 모난 것은 맞아요. 완벽을 추구하는 엄마 곁에서 받은 혜택도 많은데 자꾸 부정적인 것만 떠올리니까요. 반면에 아빠와는 늘 사이가 좋았어요. 비슷한 성향인 데다 제가 뭘 하던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편이었거든요. 엄마는 저와 아빠의 관계를 두고 '덜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죠. '그렇다면 엄마가 제발 나를 덜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를 덜 사랑한다면 나는 엄마를 더 사랑할 수 있겠구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비 오는 날이면 제 우산을 들고 교문으로 들어오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나요. 반갑고 기뻐서 사랑으로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곤 했죠. 작은 우산, 큰 우산, '각자'의 우산을 쓰고 엄마와 함께 걸었던 하굣길은 정말 행복했어요. 아, 힘들 때면 그 추억을 자주 떠올려야겠네요. 엄마와 제 관계의 답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몰라요.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