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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난슬 Headshot

책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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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마음의 양식.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성인이 된 후 내 방을 둘러보니 책은 마음의 양식일 뿐만 아니라... '짐'이기도 하다. 책 속의 좋은 말씀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의 내면에 착실하게 쌓였는가? 그 모호한 결실을 확인할 틈도 없이 책은 물리적인 공간을 먼저 차지한다.

다 읽고 방치한 책들은 꽉 찬 책장에 자리 잡지 못하고 바닥과 책상, 침대에 켜켜이 쌓여 사나운 기둥이 된다. 여기저기 들어선 책 기둥을 바라보면 '이따위로 취급한다 이거지? 언젠가 와락 무너져주마' 무생물들의 생생한 분노가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책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괴로워서 뒹굴거리다 유혹에 항복한다. 고뇌와 지름의 과정을 관찰하여 결론 내건대, 나는 독서가가 아닌 귀 얇은 소비자에 가깝다. 책들과 통장을 학대하고 있다. 죄책감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랜답시고 정리정돈 기술에 관한 책을 사서 책 기둥의 키만 키우는 어리석음이라니. 그럴 때마다 나는 '서재가 없어서 그래...'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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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이고 지적인, 제대로 된 애독가는 왠지 근사한 서재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반질거리는 원목 책장에 가지런히 책을 꽂아둔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 한가운데 단아한 책상이 섬처럼 놓여있고 우아한 서재의 주인은 거기에 앉아 뭔가를 끼적거리거나 심오한 표정을 지으며 책장을 넘긴다. 청결하고 바삭한 종이 냄새, 즐겨마시는 차의 향이 어우러져 기품 있는 아우라가 완성된다. 인테리어 잡지에 등장한 중년 문화예술인의 서재는 나의 결핍을 환기하는 시각 고문이다. 물론 내 주변에 그런 서재를 가진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 그래서 더욱 그것이 올바른 독서가의 서재인 듯 착각에 빠지게 된다. '얼마면 돼?' 천박한 질문을 던지고 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 나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공간. 허망한 동경을 품게 된다.

말끔함만 정답이냐? 정반대의 경우도 부럽기는 마찬가지다. 집 전체를 서재로 삼는 사람들은 은근히 많다. 오래된 책들에게 영혼이 생긴 듯 괴이한 기운이 감돌고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집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나같이 어중간한 책 기둥을 세워놓고 자책하지 않는 열렬한 독서가의 집. 그들의 용맹함은 집안 곳곳에 쌓인 위협적인 책더미에서 드러난다. 방파제처럼 쌓인 책들 사이에서 혼자 온기를 띠고 오로지 자신의 지적, 영적 탐구에 몰두하는 사람은 경이롭다. 그런 이의 장례식장에서 '안타깝게도 그분은 책에 깔려 돌아가셨답니다' 불운한 사망 원인을 들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마치 치열한 전장에 나가 선두에서 싸우다 전사한 이의 소식을 들을 때처럼 엄숙해질 것이다.

이도 저도 안 되는 나는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누군가 전자책이라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책들의 원망을 들으며 서재 타령을 하느니 도서관의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정신과 통장 건강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구경하며 책들을 만지니 기분도 상쾌해졌다. 대충 읽고 버려둔 책, 읽지 못하고 덮어둔 책을 볼 때마다 늘어난 마음의 빚을 갚을 방도가 보였다. 이제 나의 서재는 도서관. 더는 충동 '도서' 구매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책을 빌려서 돌아오는 길에 예쁜 삽화가 가득한 그림책을 주문했다. 당연히(아마도) 딸을 위해서.... 책은 언제쯤 도착할까. 심장이 콩콩 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