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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널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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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김소쿨(가명, 35, 여성)과 나는 고교 동창이다. 우리는 꽤 각별한 사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각자의 인생을 목격하고 곁을 지켰으니까. 아슬아슬한 고비를 맞을 때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혹은 열심히 '모르는 척해주기'도 했으니까. 모르는 척이 어찌 우정이냐고? 김소쿨에게는 그렇다. 그것이 자존심 센 그녀에 대한 예의였다. 초 밀착형 우정, 활화산 같은 대화를 나누어야 진짜 친구라는 생각을 가진 내게 김소쿨은 너무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녀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얇은 막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을 전부 보여주지도, 내어주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김소쿨과의 관계에 있어 일관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너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너한테 대체 나는 어떤 존재야? 우정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니야! 마치 세상에 단 하나의 우정, 친구에 대한 정의가 있는 것처럼 화를 내고 비난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소쿨에게는 내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일까. 함께여서 즐거운 시간도 있지만 공유하고 싶지 않은 싶은 개인사도 많은데 그걸 다 털어내라고 멱살을 잡고 흔드는 나는 그녀에게 과연 좋은 친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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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합상품 같은 관계는 없어." 김소쿨이 내게 전한 명언 중 하나이다. 한 사람이 가진 감정적, 육체적 요구 전부를 해소할 수 있는 완벽한 관계는 세상에 없다. 모두 다른 장단점을 가졌으니 다양한 사람과 교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연애관이라며 김소쿨은 농담했지만 내게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김소쿨에게 우정도 그러한 것이구나. 어쩌면 나는 김소쿨에게 자유분방하고 다혈질인 친구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직설적인 대화를 나누며 화통하게 웃고 옛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딱 거기까지. 내겐 너무 서늘한 그녀. 하지만 쿨하다. 그래서 별명도 김소쿨(so cool)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조바심을 내고 진심 운운하며 압박을 가하다니 무슨 바보짓을 한 것인가. '내가 정말 구렸구나' 깨달은 나는 그녀의 처세술이 싫지 않았다. 연애는 뜨거운 것이 좋지만 우정은 탄력적으로. 나는 김소쿨에게 중요한 것을 배웠다. 속을 뒤집어 까며 앓는 소리를 하는 나와는 다른 그녀. 인정하고 나니 편했다. 늘 숨바꼭질하는 유쾌한 친구. 그녀 덕분에 내가 약간 쿨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야, 내가 걔랑 연애하냐? 밀당하냐? 도무지 속을 모르겠어." 김소쿨과 불화를 겪은 친구 하나가 내게 토로했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겠으며 섭섭하다고. "김소쿨은... 원래 그래." 긴 대화, 짧은 결론. 이러다 진짜 다들 찢어지겠다 싶어서 김소쿨에게 문자를 했다. 정의로운 중재인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우리 우정 변치 말자는 요지의 말을 하려는데 김소쿨이 그녀답지 않은 말을 했다. "걔는 나를 뭘로 아는 거야. 내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정리 안된 감정들 말해봐야 구질구질하잖아." 그녀의 문자를 보고 마음 한편에 치워뒀던 불만들이 한꺼번에 솟아오르는 듯해서 숨을 참았다. 친구야, 우리는 너를, 몰라. 왜냐면 네가 알려주지 않으니까. 나 역시 너를 대단한 미스터리로 여겨. 독심술사도 아닌데 네 아픈 마음 어떻게 알겠니. 가끔은 최선을 다해서 구려져야, 뻔하고 초라한 바닥을 드러내야 상대가 너를 알 수 있어. 허나 진심을 숨긴 채 나는 도움도 안 되는 미지근한 말만 남기고 말았다. "너희들 각자 시간을 가져."

혼자 삭이는 괴로움의 색이 무엇인지 모르는 척하기, 슬픔을 취조하지 않기. 그녀를 위한 룰을 복습하면서도 머리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만나는 진짜 이유가 나의 구림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녀의 심정을 듣고 싶어 하는 내 절박한 태도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던 순간들은 없었을까. '나를 어떤 사람으로 아느냐'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우리들의 관계는 정말 괜찮았던 걸까.

세월이 흘러 더 복잡해진 관계가 시간을 갖는다고 저절로 나아지진 않을 것이다. 점점 어려워져가는 우정,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솔선수범, 구질구질이 특기인 내가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자위에 불과한 반성을 그만하고 대화 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야? 기분은 어때?' 통속극 속 등장인물처럼 득달같이 친구에게 달려가는 상상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새벽, 친구들이 하나둘 서로를 떠나간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