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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녀는 헌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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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는 이혼을 해도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이혼녀는 곧 헌 여자다. 그런 낙오자 여자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영향을 받고 너는 페미니즘 광신도가 되었다. 너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우리 가정을 파괴했다. 너는 아내로서의 본분도 다하지 못한 이기적인 여자다. 정신 차리길 바란다."

친구가 전 남편에게서 받은 문자의 요약이다. 이십 대 초반에 그를 만나 오래 연애하다 재작년 결혼했다. 친구가 이혼 의사를 밝힌 것은 올해 초로 내가 듣기에도 뜻밖의 일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고 당돌한 사람이다. 그녀의 전 남편 역시 유머러스하고 자유분방한 남자이기에 나는 그들의 결합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차이 때문에 종종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던 전 남편. 내 친구는 그의 세계와 인맥 속에 살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워낙 사교적이고 적응력이 뛰어난 성격이라 그의 지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나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이혼 소식을 알렸으니 놀랄 수밖에. 하지만 마음 다른 한편에서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나타난 징조들, 그녀의 성장이 내 눈에도 훤히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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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십대인 그녀는 전 남편을 떠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다. 어리고 미숙했던 날들을 전부 전 남편과 지내온 터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의 테두리를 벗어난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그간 모른 척했던 내면의 술렁거림. 그것이 멈추지 않기에 그녀는 한껏 자라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로 그녀만의 삶을 계획하기. 그러한 성장이 내게는 자연스러워 보였으나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한 남자에게는 엄청난 배신으로 느껴진 것 같았다. 그녀의 전 남편은 자신이 보여준 문화에 물들고 변화된(그는 되고 그녀는 안된다) 그녀를 비난했다. 대체로 그렇듯이 자기 욕망에 솔직하기로 선언한 여성들에게 따라붙는 진부한 단어들을 동원했다. '가정'의 안정을 추구하는 대신 '밖'으로 나도는 그녀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희생의 미덕을 모르는 여자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특히 페미니즘 광신도가 되었다며 몹시 분개했다. 페미니즘 때문에 이혼을! 제길, 몹쓸 사이비 신앙같은 페미니즘!

둘 사이의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니 그녀가 내팽개치고 달아난(그의 표현에 따르면) 결혼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당사자가 아닌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갑자기 더 저열한 모습을 보이는 쪽이 그녀의 전 남편인 것은 분명하다. 그가 분노하던 그 순간 평소 그가 품고 있던 편견과 가부장적 삶의 태도가 여과 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이혼은 곧 실패, 낙오.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가차 없는 비난과 훈계를 늘어놓는 안타까운 사람. 그가 '좋은 사람이 되라는 채찍질'이라며 그녀에게 쏟아낸 말들은 정말 폭력적이었다. 그는 이혼이 본인의 탓도 아니고 그가 잘 아는 '순진했던' 여자의 탓이 아닌, 기이한 사상에 물들어 일어난 일이라고 착각하고 싶은 것일까. 사실 내 친구는 딱히 페미니즘 서적을 읽거나 관심을 둔 적이 없는 사람이다. 페이스북 게시글이나 뉴스를 보며 '여자로 사는 세상'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이제 막 깨어나서 꿈틀대는 성장의 욕망에 충실하고 싶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솔직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녀의 전 남편은 아직도 그녀를 자신의 목소리가 없는 인형으로 대한다. 생생한 영혼으로 세상을 살아갈 줄 모르는 미숙한 존재라고 폄하하고 있다. 그가 자연스럽게 누리던 자유, 변화의 추구, 성장은 왜 결코 그녀의 것이 될 수 없을까. 그들 관계의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별의 사유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종속을 요구하는, 슬픔과 분노가 헷갈리는 남자의 어설픈 비난이다. 나의 친구. 헌 여자 아닌 늘 새로운 여자. 그녀의 인생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찬란하게. 나는 그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그녀에게 속삭이고 싶었다. 언제나 새로운 그녀의 영혼을, 잊지도 잃지도 말라고.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