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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밖의 요괴 할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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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엄마는 나중에 뭐가 될 거야? 엄마는 요괴 할멈이 될 거야. 왜? 멋있잖아. 요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딸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세상에 대한 이치가 들어서기 전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간다. 만약 요괴라는 단어를 안다고 해도 세 살 아이는 멋있다고 손뼉 쳤을 것이다. 만화에 나오는 괴물을 무서워하면서도 강력하게 매료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쁘고 귀여운 캐릭터들은 늘 몰려다니기 마련, 만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란 그들의 모험에 극적으로 등장하여 용기와 우정을 시험하는 존재다.

그러나 미지근한 개구쟁이들보다 몇 배는 더 화끈하고 자극적이기에 어린 딸은 괴물을 좋아한다. 요즘 등장하는 괴물들은 과거와 다르게 주인공의 내적 성장과 공동체의 화해를 돕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겉모습도 생활 방식도 다른 존재들이 서로 상생하며 살아간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요즘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향인 것 같다. 그런 다양한 괴물들을 관찰하며 유아기 오락을 즐기고 있으니 딸은 우리 세대와는 다른 가치관을 갖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만화 속 괴물들은 전부 이해할 가치가 없는 평면적인 악당들이었다. 최근의 어린이 영화들이 전하는 세련된 혹은 진보적인 메시지는 찾기 힘들었다. 딸과 함께 따뜻한 교훈이 담긴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며 격세지감, 더 감동하는 쪽은 언제나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거 만화나 이야기에 등장했던 악당과 괴물에 더 깊이 빠져 있다. 괴물로 태어나 괴물로 살아간다는, 충실하게 제 악역을 다하다 정의의 이름으로 사라져간 캐릭터에 깊은 연민을 느끼며 공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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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모르는 존재. 그 고집스러움. 추하고 극단적인 감정에 온몸을 내던져 사악한 괴물이 된 이야기 속 영혼들. 비뚤어진 나는 그들의 마음과 행동에서 비장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거나 상처 입은 괴물들이 품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소리 지를 때 나는 그들과 동질감을 느낀다. 상처투성이인 과거를 회상하며 찬란한 영웅에 의해 덧없이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고통받은 괴물이 과거와 화해하거나 이해받지 못한 채 사라져갈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린다. 어째서일까? 자문하면 답은 뻔하다. 내 안에 괴물들이, 갖은 이름 붙은 악당들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에 사로잡혀 밤새 뒤척인 날들. 그런 감정에 매몰되어 사느니 차라리 이 세계로부터 자발적으로 퇴장하고 싶었던 암담한 날들. 치워도 끝이 없는 마음의 똥들이 고약한 냄새를 풍길 때. 그 냄새가 나의 전부가 되어버릴 듯할 때 나는 얼마나 괴로웠는가. 그래서 나는 이야기 속 괴물들을 응원하기도 한다. 두 뺨이 상기된 채로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나처럼 사라질 생각하지 말고 싸워' 주먹을 쥔다. 내가 편애하는 괴물들은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착한 결말을 위해 희생되는 존재 아닌 제 악취와 뒤틀림마저 받아들이며 죽어가는, 용기 있는 영혼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줄 모르는 오해 속 영웅들이다. 옛날 옛적 만화를, 그저 그런 세상의 현실을 겪고 자란 나라는 여자는 낙인찍힌 괴물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딸이 장래희망을 물어볼 때조차도 진지하게 요괴 할멈이 되겠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잠 안 자는 유아의 지루한 밤, 딸에게 너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고 묻자 딸은 데구리(그녀의 사전에 따르면 데구리는 괴물), 착한 데구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즐겨 보는 만화에 등장하는 선하고 개성 있는 괴물이 되고 싶은 걸까, 추측하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네가 살아갈 세계는 나와는 다를 테니까. 다만 엄마의 만화에서 엄마는 요괴 할멈이 될 거야. 순응을 모르는 지랄 맞은 요괴. 추하게 늙어도 부끄러움 없는 요괴가 되어서 너 같은 괴물들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나 지켜볼 거야. 아마도 내가 사는 이야기 속, 엄마가 맡고 싶은 역할은 그런 게 아닐까 싶어.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