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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릴라 대화와 한국의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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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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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혜정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샹그릴라. 영국인 소설가가 그려낸 히말라야 산맥 어딘가에 있다는 불로장생의 이상향이다. 샹그릴라 대화는 영국의 씽크탱크인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싱가포르 정부와 협력해서 2002년부터 매년 싱가포르에서 개최하는 '아시아안보회의'의 이름이다. 유럽과 아시아 각국의 국방 관료들이 참석한다. 영국의 오리엔탈리즘이 샹그릴라를 상상해냈다면, 영국 제국주의의 역사적·정치적·지적 유제가 샹그릴라 대화를 운영해오고 있다.

올해 제15차 샹그릴라 대화가 지난 주말, 6월 3~5일에 열렸다. 샹그릴라 대화는 서구 제국주의의 유제와 미국 패권, 그리고 새로운 제국을 꿈꾸는 중국의 군사주의 및 아세안 권위주의 국가들의 집단적 생존전략이 각축하는 안보 담론의 경연이다. (인터넷의 도움으로 밀린 드라마 다시보기처럼 모든 패널을 시청한 소감이다) 이 경연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이상에서 보자면 위선의 경연이자 평화와 안정의 잔혹극이다.

위선의 경연

쿠데타로 집권한 태국 수상이 올해 기조연설을 맡았다. 그는 미국, 중국, 일본의 기존 중요 행위자와 인도, 러시아, 호주, 한국, 아세안 신흥세력 간의 이원적 구조가 지니는 불균형을 아시아 안보의 구조적 특징이자 도전으로 진단했다. 구체적인 안보 현안으로는 중국의 부상에 따른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문제, 북핵 문제와 한반도 문제, 테러, 군비경쟁, 이민, 사이버안보, 환경 문제를 꼽았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주권을 존중하며 당사국들의 낮은 수준의 합의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신뢰를 구축하는 아세안 방식이다. 이는 태국의 민주화 과정에도 적용되는, 즉 비민주적 통제를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일반 패널토론은 다섯 개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주최 측의 의례적인 특혜 제공으로 미국 국방장관은 제1패널에서 단독 연설의 기회를 얻었다. 원칙에 바탕을 둔, 인도로 확장되는 다양한 안보 네트워크 건설의 명분으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카터 장관의 연설(Creating a principled security network)이 패널 토론 전체의 핵심이 되었다. 인도, 말레이시아, 일본 국방장관이 속한 제2패널의 논의는 기존 아시아·태평양을 인도·태평양으로 확대하는 데 따르는 도전들을 부각시켰다. 중국 대표는 프랑스, 베트남과 같이 제4패널에 배정되어 미국의 비판에 대한 격렬한 반박을 제기했고, 마지막 제5패널에 캐나다, 싱가포르와 같이 배정된 러시아 대표 역시 사드 반대 등 미국 패권에 대한 중·러의 공동 대응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인도네시아, 영국, 한국 국방장관이 포함된 제3패널은 질의응답으로 보면 (다른 패널과 달리 질의응답 영상이 아예 제공되지 않았다) 가장 무난한 패널이었지만, 한민구 국방장관의 연설도 위선의 경연에서 크게 뒤진 것은 아니었다.

카터 장관의 이상은 한미일 삼각협력과 같은 기존의 동맹 체제를 뛰어넘는 미국·인도·중국, 일본·호주·인도 등 다양한 양자, 삼각, 다자 안보 네트워크의 건설이고, 그 물질적 기반은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이다. 그는 아시아·태평양에 현재 배치된 첨단 군사력뿐 아니라 기술적 우위, 전략, 전술의 유연성 등에서도 미국의 군사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그의 이념적 비판은 '항해의 자유' 등 기존의 국제규범 및 주변국들의 우려에 근거한 것으로,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일방적 군사화는 고립을 자초하는 만리장성을 쌓을 뿐이라고 일갈한다.

미국은 '항해의 자유' 원칙의 근거가 되는 유엔의 해양법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군사화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미국은 공해는 물론 우주와 사이버 공간 등 소위 지구적 공유지(global commons)에서 독점적인 군사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질의응답에서는 항해의 자유가 공해 상에서 미국의 군사적 시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과 함께, 원칙을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트럼프의 등장으로 과연 미국이 기존의 동맹 체제조차 지켜낼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카터 장관의 연설이 테러리즘의 위협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데 반해, 인도와 말레이시아 국방장관은 공히 테러리즘을 최대의 안보 위협으로 설정하고 있다. 인도의 규정대로 수에즈 운하 동쪽에서부터 인도·태평양의 지정학적 경계가 설정되면, 미국이 중동에서 빠져나와 아시아로 회귀하기는 불가능하고 파키스탄·인도의 경쟁 구도는 되살아나며 이들 핵 확산국의 포섭으로 북핵 문제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희석된다. 말레이시아 국방장관은 국내 치안과 국제 대테러작전의 경계가 모호해졌음을 강조하며, 국내에서 비민주적 통제의 기반이 되기도 하는 양자의 통합을 정당화한다. 또한 그는 아세안이 집단적으로, 특히 아세안 국방장관 회담의 수준에서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 와중에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인도 역시 미국과의 양자 협력과 동시에 중국과의 양자 관계도 강화할 것이라고 천명한다.

중국 대표 해군 제독의 연설은 다극화와 지구화에서 시작한다. 즉, 미국 패권의 궁극적 쇠퇴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주창하는 국제규범에 맞서 지역의 (즉, 중국의) 조화와 상호이익 등 전통적 가치를 내세우며, 일대일로와 국제평화유지군 활동 등을 통한 중국의 공동 번영과 안보에 대한 기여를 강조한다. 이어서 그는 남중국해 문제에서 미국 등 역외 세력의 간섭은 단호히 배격하고, 필리핀의 일방적인 중재요청은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고 일축하며,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인 남중국해를 힘이 없어 과거에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군인으로서 비통함을 느낀다고 결연히 밝힌다.

사드 문제에 관해서는 러시아 대표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드로 인한 전략적 불안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러시아와 중국의 공조는 미국의 전 세계적 미사일 방어망이 지니는 위협이라는 일반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질의응답 중에는 사드 관련 5개국(한, 미, 일, 중, 러)이 다자회담을 개최하라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고, 주최 측(IISS)은 다자회담 실현을 위한 촉진자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사드에 대한 한국의 입장, 즉 '북한의 위협을 막기 위해 한국이 방어수단을 선택할 권리'라는 주장이 국제적으로 쉽게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 외교 최악의 모험

한국의 문제는 사드에 그치지 않는다. 카터의 연설에서 일본이나 호주는 물론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 등이 새로운 네트워크의 주요한 파트너로 설정된 데 반해, 한국은 한미일 삼각협력의 맥락에서만 언급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기였다면 동맹의 가치 하락에 대한 보수의 총공세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물론 국방부의 해명처럼 한미동맹이 굳건하지 않다는 의미는 전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굳건한 한미동맹이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미국의 새로운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네트워크에서 한국의 가치는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번 샹그릴라 대화에서 한민구 국방장관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국제규범을 명분으로 미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와 동일한 입장을 보여 온 일본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분쟁 당사자가 아닌 역외자는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지원이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안정에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아세안처럼 집단적으로 미·중의 전략적 경쟁을 헤쳐 나갈 수단도 없는 입장에서, 한국 외교가 상당한 모험을 감수한 것이다. 게다가 한 장관은 북한의 대화 제의를 위장 평화공세로 일축하면서도, 국제사회에 대해서는 다자간 안보대화, 국방정책의 투명성과 신뢰 제고, 안보의 복합성, 다양성,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며 경제, 외교, 사회, 환경 등 다양한 요소를 동시에 고려하는 포괄적 안보를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오히려 6자회담과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시급하고도 포괄적으로 북한에 대해 시행되어야 할 것들이다. 대북 제재에 '올인'하면서 포괄 안보를 설교하는 한국의 위선은 어쩌면 이번 샹그릴라 대화 최악의 위선이자, 한반도 평화의 최악의 잔혹극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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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아시아안보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한 한민구 국방부 장관(오른쪽)이 4일 샹그릴라호텔에서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상과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이 글은 참여연대-프레시안 공동기획 평화칼럼 <이제는 평화> 시리즈 중 하나로, 프레시안에도 함께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