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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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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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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감옥 가기 전까지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투표 날은 수당 나오니까 근무했죠. 누가 돼도 똑같고, 당선되면 말 바꾸고, 공약 지키는 사람 못 봤고. 그런데 이번엔 다르지 않을까 기대가 생겨서 투표했어요."

강원도 원주에 사는 서른한살 청년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에서 '출발선을 똑같이 만들겠다'는 후보를 찍었다고 했다. 여러 친구들도 그 공약이 확 와닿아 다들 그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했다. 고교 동창 '절친' 열 명은 앞선 두 차례 대선과 달리 이번엔 모두 투표한다고 했다.

청년은 4년제 대학에 입학했지만 500만원이 넘는 등록금 마련이 힘겨워 자퇴하고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첫 직장인 유통서비스 회사에서 계약직 6개월 만에 정규직이 됐다. 그런데 아침 7시 집을 나서면 자정까지 일하기 일쑤였다. 먼 점포로 재고조사를 나가 새벽 4시에 귀가해 잠시 눈 붙이고 다시 출근해야 했다. 미친 듯이 일했는데 200만원을 손에 쥐기 힘들었다. 월급이 고정급이 아니라 사람 등골 빼먹는 '건당 수수료'였기 때문이다. 그를 비롯해 '여친'과 헤어진 동료들이 여럿이었다. 3년이 되어갈 무렵 회사를 그만뒀다.

친구 소개로 들어간 두 번째 직장은 경기도 안성의 부품 소재 전문기업. 기숙사에서 지내며 주야 12시간 맞교대로 일했다. 토요일은 무조건 일했고, 일요일도 한 달에 두 번은 근무해야 했다. 한 주는 72시간, 다음주는 84시간 일해서 월 250만원을 받았다. '잔업·특근을 포함해 1주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근로기준법, "휴일근로가 연장근로 한도에 포함된다"는 법원 판결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살인적인 불법 노동이 공단을 활개치는데 근로감독은 없었다. 청년은 2년 가까이 버티다 떠났다. 세 번째 직장은 중견 자동차 부품 회사의 사내하청 업체였다. 연봉제라는 이유로, 잔업 수당도 없이 하루 11시간 일해야 했고, 정규직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친구들도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비정규직·하청 일자리를 떠돌았다. 샴푸 원료물질 제조회사에 다니는 친구만 정규직이 됐고 유일하게 결혼했다. 돈 많은 부모를 두지 못한 친구들은 서로에게 기댄 채 조금이나마 나은 일자리를 찾아다니고 있다. 일하고 쉬고 사랑해야 할 서른살 청년들이 살고 있는 2017년 대한민국이다.

매년 걷히는 상속·증여세 5조4422억원(2017년)으로 매년 20살이 되는 61만명(2018년)에게 1인당 1천만원을 지급하자는 '사회상속제' 공약. 인구가 해마다 3만명씩 줄어 지급액은 늘어나고, 상속·증여세를 높이면 더 많이 줄 수 있다. "이런 정책이 우리가 스무살 되기 전에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후배들이 등록금 내고 방 구하고 기술도 배울 수 있잖아요. 빨리 됐으면 좋겠어요." 원주 청년이 처음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유다.

내일 새벽이면 19대 대통령이 탄생한다. 홍준표를 뺀 후보들의 공통 공약. 최저임금 1만원으로 월급 좀 올리고, 노동시간 줄여 저녁이 있는 삶을 느낄 수 있을까? 상시업무에 비정규직·하청 사용을 금지하고, 공동사용자 책임으로 알바노동자가 맥도날드나 씨유(CU)를 상대로 협상할 수 있을까? 촛불이 준 희망, 정치가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청년들의 기대가 또다시 배신당하지는 않을까? 박근혜가 취임식 날 광화문에서 우체국 집배원에게 임기 내 반드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환하게 웃던 장면이 떠오른다. 배신의 정치가 촛불을 부른다는 걸 새겼으면 좋겠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