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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뻔한 세계에서 '혁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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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신촌 한 백화점의 화장품 코너는 못 하나 꽂을 곳 없이 붐볐다. 연말 특수를 단단히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선배의 생일파티 겸 송년회에 가져갈 선물을 고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전해주었다. 그가 자살했노라고.

그때 느낀 현기증이 다소 경박한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 알림음과 함께 전해진 부고의 충격 때문인지, 이름 모를 화장품들의 진동하는 향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생일, 송년회, 자살.... 이 단어들의 연쇄는 곧 이런 문장을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찬찬히 나이를 먹고 한 해를 보내는 의례를 준비할 동안, 누군가는 이 모든 것들을 그만둘 준비를 했구나.'

그러자 내가 속한 시공간의 분주함과 번잡함이, 그 기묘한 활기와 의욕들이 꽤 생경해졌다. 자연스럽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일 뿐, 내가 지체 없이 쇼핑을 마치고 유유히 백화점을 빠져나왔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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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도록 '그 자살'에 대해 쏟아지는 논평들을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헤드라인만 거칠게 훑었다. 그가 유독 예민한 멤버였다는 점,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면서도 자발적(?) 고립을 택한다는 우울증 환자 특유의 역설적 속성, 개인이 입을 내상을 돌보지 않는 한국 연예산업의 괴물적 성격, 영향력 있는 개인의 자살에 의해 촉발된다는 또 다른 자살....

'더 정확한' 설명이나 분석을 원한 게 아니다. 두려운 것은 '그 자살'에 대한 해석의 '즉물성' 자체였다.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라는 부제가 달린 책에서 인문학자 천정환은 이렇게 썼다. "자살을 다루는 수없이 많은 단신들은 자살이라는 복잡한 인간 드라마를 그야말로 단신화한다. 그런 단신은 자살자의 개별성을 다 뭉개놓는다."

과연 그렇다.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그'는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 '우울증 환자', '내성적이고 외로웠던 사람', '개인을 소모시키는 한국형 연예산업과 여론으로 둔갑한 악플의 피해자' 같은 '뻔한' 존재로 환원된다. 이 모든 분석들은 '그 자살'이 놓인 의미망의 일부를 드러낸 것이겠지만, 여전히 불충분하다. '자살'은 개인 고유의 실존적 선택이면서도 동시에 사회구조적 결과이지 않은가. 미시적·거시적 조망을 총동원해도 '그 자살'의 의미는 언제나 그 이상이다. '자살'은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에 있다.

'불가지한 것'에 대한 앎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불가지에 도전하는 모든 불충분한 묘사와 해석이 쓸모없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자살을 선택하는 (반)주체적 인간에 대한 평면화된 해석과 묘사는 인간 언어 자체에 내재한 한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절망스러운 것은, '자살'을 선택하는 인간의 복잡미묘함에 대한 사유 자체를 기각하는 태도들이다. '남자'의 죽음이기 때문에 애도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이 비인간적인 세계의 급진적 변화를 바란다는 '워마드' 같은 곳에서 자행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가. 인간과 세계를 그토록 '납작하고 뻔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꿈꾸는 '혁명'이란 대체 뭔가.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이 해당 개인에게, 또 이 세계에 어떤 신호인지 해석하는 데 관심 없는 그 폭력적 무지, 무지의 폭력. 그건 '혁명'은커녕 이 뻔한 세계를 더 뻔하게 만든다.

그래서 생각했다. 모든 인간의 선택과 변화 (불)가능성을 본질화하는 그 혁명에 함께하지 않겠다고. 이토록 '뻔한' 세계에서, 모두의 안식을 빈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