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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계 블랙리스트'도 밝힐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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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loks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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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진상이 마침내 드러날 모양이다. 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블랙리스트에 대해 책임을 묻고, 문체부를 일신할 것'을 지시했고, 도종환 장관도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블랙리스트에 대해 철저히 파헤치겠다고 밝혔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전모를 규명하는 것은 박근혜-최순실 사태에서 드러난 어떤 사안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은 개인의 비리 차원을 넘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이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모든 자유의 모태이자 민주공화국의 전제조건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문화계 블랙리스트 못지않게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학계 블랙리스트다. 사실 학계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불거지기 훨씬 전부터 비판적 학자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의혹이 널리 퍼져 있었다.

돌아보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학계에 대한 정치적 탄압은 끊이질 않았다. 황지우 한예종 총장의 해임과 진중권 중앙대 교수의 재임용 탈락 등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수많은 탄압이 잇따랐고, 중앙대 독일연구소나 상지대-성공회대-한신대가 공동 설립한 민주정책연구원의 경우처럼 진보적 학자 중심의 연구단이 한국연구재단의 심사에서 1등을 하고도 탈락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지난해에는 학내에서 선출된 국립대 총장들이 정치적 성향 때문에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일이 빈발했다.

이런 정치적 탄압의 배후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학계의 상식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청와대에서 기획되고 문체부에서 실행되었듯이, 학계 블랙리스트도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교육부에서 실행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09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 5개 분야 단장들이 집단 사퇴하면서 발표한 성명서는 이러한 정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연구재단이 조폭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민주적으로 운영되었고, "심사, 선정 과정에서 정부 공무원들의 개입이 많았으며", "재단 운영의 핵심인 독립성, 공정성, 투명성이 이미 훼손된 상황"이기에, "이러한 부도덕한 재단이라면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는 비판이 재단 내부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교육부 관료가 심사와 선정 과정에 개입하여 3등급으로 분류된 블랙리스트에 따라 최종 선정에 관여했다는 학계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내부자들이 확인해준 셈이다.

학계 블랙리스트의 가장 파괴적인 해악은 학자의 자기검열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학자의 자기검열은 독재자의 사상검열보다 더 무섭다. 독재정권의 물리적 검열은 대중의 분노라도 사지만, 학자의 심리적 검열은 무색무취한 독가스같이 부지불식간에 학자의 의식을 마비시킨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예술가의 영혼을 좀먹는다면, 학계 블랙리스트는 학자의 정신을 썩어들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블랙리스트는 그 자체가 인간 정신에 대한 범죄다.

'헬조선'은 우연히 닥친 재난이 아니다. 그 저변엔 지식인의 침묵과 굴종이 있고, 그 배후엔 블랙리스트가 있다. 지식인이 자기검열의 늪에 빠져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는 이미 지옥의 문턱에 들어선 사회다.

그렇기에 학계 적폐청산 1호는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이 되어야 한다. 교육부 내에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학문 탄압의 진상을 밝히고, 관련 청와대 인사와 교육부 관료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부당한 탄압의 희생자들의 권리를 회복시켜야 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