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누리 Headshot

한국 민주주의의 '주적'은 냉전체제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1
뉴스1
인쇄

대선 후보 티브이토론을 보면서 모멸감을 떨칠 수 없었다. 1600만 촛불의 기억이 벌써 사라진 것인가. '시민혁명' 직후의 선거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토론 내내 '박근혜 사태'에 책임이 있는 구여권 후보들이 오히려 공세를 펼쳤고, 구야권 후보들은 수세에 몰렸다. 조기 대선의 원인이 된 박근혜 정권의 부패와 무능, 민주주의의 후퇴, 남북관계의 파탄, 외교의 총체적 실패 등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가히 정치적 정신분열, 적반하장의 상황이다.

구여권 후보들은 예의 비루한 냉전 프레임을 다시 들고나왔고, 구야권 후보들은 옹색하고 모호한 답변으로 궁지에 몰렸다. 수구 냉전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 행태야 예상된 바이지만 구야권 유력 후보들이 보인 철학의 빈곤과 역사의식의 부재는 실망스러웠다. 정치적 소신과 변혁적 비전을 갖고 토론을 펼친 이는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가 유일했다. 그는 냉전 프레임을 '우려먹는' 구여권 후보들뿐만 아니라, 무소신과 기회주의적 변명으로 일관한 구야권 후보들도 준엄하게 질책했다.

'색깔론'이 창궐하는 선거전과 최근의 위태로운 한반도 정세를 보며, 한국 민주주의의 '주적'은 바로 냉전체제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

첫째, 냉전체제는 한국의 국가주권을 형해화했다.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국민주권의 핵심인 군사주권을 미국에 양도한 것은 냉전주의자들의 수구적 행태가 남긴 국가적 상처다. 그것은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훼손하고, 민족자결이라는 근대국가의 기본원리마저 부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온전한 판단력이 의심되는 타국 대통령의 손아귀에 국가의 운명을 통째로 떠맡긴 비참한 처지에 놓였다.

둘째, 냉전체제는 한국의 정치구도를 기형화했다. 한국의 정치구도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정상적인 정치구도가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과두적으로 권력을 분점하는 가운데 진보가 배제되어 있는 기형적인 정치구도다. '보수'라 불리는 정치집단은 기실 냉전에 기생하는 '수구' 집단에 불과하며, '진보'라고 불리는 정당도 세계적 기준에서 보면 보수정당에 가깝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이런 극단적인 우편향 정치구도는 좌파를 '악'으로 낙인찍어온 냉전 정치문화의 결과물이다.

셋째, 냉전체제는 한국의 경제정의를 파괴했다. 노동, 노동자, 노동조합을 악마화하고, 평등의 가치를 불온시하는 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재벌 독재의 경제 질서도 냉전에서 배태된 개발독재의 산물이다.

넷째, 냉전체제는 한국인의 성격구조를 왜곡했다. 냉전은 한국인의 내면에 레드콤플렉스, 반공주의, 공격성, 자기검열, 흑백논리의 심성구조를 심어놓았고, 이를 통해 내면화된 권위주의적 성격은 한국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로 전락시켰다.

이처럼 냉전체제는 이 땅에서 국가주권, 정치구도, 경제질서, 성격구조를 총체적으로 왜곡해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린 주범인 것이다.

1990년대 초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지구상에 냉전이 남아 있는 곳은 한반도밖에 없다. 여기서 냉전은 지난 70년간 한민족을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전락시켰고, 한국을 기형국가로 만들었으며, 한국 민주주의를 병들게 했다. 냉전체제의 극복은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냉전체제의 청산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것 - 이것이 색깔론의 광풍 속에서 탄생할 차기 대통령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시대적 명제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