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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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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가히 '거짓말 공화국'이다. 대통령부터 장관, 청와대 고위인사들을 거쳐 재벌총수, 대학총장, 교수, 의사에 이르기까지 최고 권력자와 엘리트들이 지난 몇 달간 펼쳐온 현란한 거짓말 퍼레이드는 경악을 넘어선다. 국민들은 최소한의 윤리도, 자존심도, 수치심도 없는 저들의 파렴치에 할 말을 잃었고, 저런 자들이 나라를 지배해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권력자들의 공공연한 거짓말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 전후로 도널드 트럼프가 토해낸 거침없는 거짓말과 거짓 주장은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 이후 한 달간 쏟아낸 거짓 주장과 사실 왜곡만 132건에 이른다고 전한다.

바야흐로 '거짓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오죽하면 '탈진실의 시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겠는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탈진실(post-truth)'을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고,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올해의 독일어로 뽑았다.

실로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과 '진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활개 치는 세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거대한 사상적, 사회문화적, 기술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했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이 열어놓은 새로운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얀베르너 뮐러)을 만들어냈다.

사실과 진실의 권위가 무너진 폐허에서 선동가들의 거짓말이 번져가고 있다. 그들의 거짓말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들이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여,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문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 사이의 논쟁에 근거하고, 의견의 타당성은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이 무너지면 의견이 무너지고 결국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거짓의 시대가 유독 미국에서 화려하게 개화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대륙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대중문화를 통한 주도면밀한 우민화가 만들어낸 이 '무사유 사회'에서 그는 새로운 유형의 파시즘의 싹을 본다. 그가 쓴 〈계몽의 변증법〉(특히 '문화산업론')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동료인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모두 이 '사유하지 않는 인간들'에게서 받은 충격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들의 예견은 적중했다. 오늘날 '트럼프 현상'을 낳은 무사유, 무지, 반지성주의는 미국 사회의 '오래된 미래'였던 것이다. 트럼프는 선거유세에서 "나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며 내놓고 무지를 찬양했다. 바로 이런 대중의 무지가 미국을 '거짓의 시대'의 향도로 만든 사회문화적 토양이다.

거짓의 시대에 선동가들에게 맞설 무기는 '지식'과 '사유'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파시즘은 공포를 먹고 살지만, 민주주의 속에 기생하는 파시즘은 무지를 먹고 산다. 저질 오락방송을 통한 우민화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의 독서율로 상징되는 우리네 일상이야말로 박근혜의 '거짓말 공화국'을 탄생시킨 숨은 주범인지도 모른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