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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 촛불의 명령은 '체제 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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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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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26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무려 200만 가까운 시민들이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단군 이래 최대 시위이고, 아시아 역사상 최대 시위이며,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대규모 시위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시위의 규모만이 아니다. 광화문 광장은 그 자체가 거대한 '민주주의의 학습장'이었다. 시민들은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자유로이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면서도, 경찰들에게 꽃을 선사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문화행사와 기발한 풍자 속에 시위를 '즐기는' 남녀노소 모두가 해방된 자유인이었고, 기품 있는 민주시민이었다. 근대 이후 선각자들이 꿈꿔온 '자유의 왕국'이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자유, 평등, 우애'의 유토피아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렇게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무너진 국격을 시민들이 다시 세워놓고 있었다. 주변의 외국 학자들과 기자들은 한결같이 한국의 시위에 대해 '경이롭다'고 했다. 이렇게 열정적이면서도 유쾌하고, 이렇게 활기차면서도 평화로운 시위를 본 적이 없다고 했고,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시민들의 '경지'가 놀랍다고 했다.

200만 촛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촛불이 요구하는 것은 단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대통령의 종복으로 권력에 기생해온 새누리당, 국민들을 무한히 착취해온 재벌,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검찰, 권력의 나팔수로 타락한 언론에 대한 탄핵이고, 대통령의 부패와 전횡을 견제하지 못한 무능한 야당에 대한 질책이다. 촛불은 또한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절규이며, 더 이상 굴종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의이다. 요컨대 촛불은 부패하고 파렴치한 '구체제' 전체에 대한 탄핵이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절규이며, 더 이상 타락한 기득권 집단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의이다.

그렇기에 200만 촛불의 명령은 '정권 교체'가 아니라 '체제 교체'다. 정권교체가 '포악한 주인'을 '온화한 주인'으로 바꿀 수는 있지만, 국민을 주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 국민은 최근 역사를 통해 배웠다. 촛불은 해방 이후 지난 70년간 이 나라를 지배해온 구체제의 낡은 의식, 제도, 관행을 타파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는 명령이다. '국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아온 구체제를, '인간 존엄'을 국가의 존재이유로 삼는 '신체제'로 교체하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네 개의 체제를 기축으로 작동해왔다. 첫째는 정치 영역의 '수구-보수 과두지배 체제'이고, 둘째는 경제 영역의 '재벌독재 체제'이며, 셋째는 사회 영역의 '권위주의 체제'이고, 넷째는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체제'이다. 바로 이 네 요소로 구성된 '구체제'가 이 나라를 '헬조선', '절망사회'로 만든 주범이다. 촛불의 외침은 바로 이 구체제를 변혁하라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다고 '체제'가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 정권이 구체제를 더 강화시킬 수도 있다. 기회주의적 정치인, 탐욕스런 재벌, 타락한 검찰, 부패한 언론의 커넥션을 발본적으로 청산하지 않는 한, 정권교체는 구체제를 세련되게 포장해서 영속시키는 '기만적 승리'가 될 수도 있다. 1987년에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주의의 형식'을 위해 싸웠다면, 2017년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내용'을 쟁취하는 해가 되어야 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