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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계급사회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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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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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이 지옥 속에 밀어 넣을 자신이 없어요."

출산율 저하를 화제로 다섯 명의 대학원 여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차였다. 모두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말에 깜짝 놀라 이유를 묻자 한 학생에게서 돌아온 답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20대 중반의 여성들이 우리 사회와 교육에 대해 이 정도까지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숨 막히는 경쟁에 내몰리는 교육환경과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 좌절과 분노로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 사회에서 아이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라는 것이 가능할까요?"라는 물음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서울의 한 로스쿨이 출신 대학을 다섯 등급으로 나눠 점수를 차등 부여하는 '출신대학 등급제'를 운영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리 시험을 잘 보고 자격증을 잘 갖춰도 출신 대학의 등급이 낮으면 합격이 불가능한 구조란다. 가히 한국판 카스트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출신 대학이 하나의 '신분'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학교가 생존경쟁의 전쟁터, 신분상승의 투기장으로 변해버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친구를 영원히 짓밟고 올라서야 할 대상으로 보는 아이들, 극단적인 경쟁에 지쳐 우울한 아이들 - 이런 아이들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이 아닌가.

학벌이 숙명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한 인간이 이룬 어떠한 성취도, 한 개인이 기울인 어떠한 노력도 학벌의 벽을 넘어서기 어려운 학벌계급사회가 우리네 현실이다.

몇 해 전 부르메스터(Burmester)라는 세계적인 음향기기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 회사는 독일의 대표적인 히든챔피언(강소기업)이다. 자유분방한 예술가풍의 사장이 직접 나와 회사를 소개했다. 디터 부르메스터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음악에 심취해 졸업하자마자 밴드를 결성하여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가, "자신이 만든 곡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싶어" 28살에 베를린 공대에 들어가 오디오 분야 공부를 시작했고, 30대에 오늘의 회사를 세웠다고 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 사회가 대학입시 한번으로 개인의 인생이 결정되는 '원샷 사회'라면, 독일은 개인의 꿈을 실현할 기회가 폭넓게 열려 있는 '텐샷 사회'다.(빈프리트 베버) 개인에게 기회가 널리 열려 있으니, 부르메스터처럼 제2, 제3의 인생에 도전하는 독일인은 적지 않다. 이것은 독일이 경제기적을 이룬 한 요인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으니, 잘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차별사회'에서 '기회사회'로, '원샷 사회'에서 '텐샷 사회'로 전환할 때가 되었다. 좋은 사회란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공평하게 열려 있는 사회다. 특히 대학은 기회를 열어주는 문이 되어야지, 기회를 가로막는 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번의 시험 결과로 모든 가능성을 박탈하는 원샷 사회는 인간의 다양한 재능을 짓밟는 야만사회요, 개인의 무한한 잠재력을 죽이는 불임사회다. 학벌계급사회를 넘어서는 근본 처방은 엘리트 대학 체제를 혁파하여 대학의 좁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처럼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한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대학은 특권의 고지가 아니라, 기회의 평지여야 한다.

누구나 자유로이 자신을 실현할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무한경쟁으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고, 생명을 잉태하는 자연의 축복이 지옥의 공포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