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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왜 시속 1000마일 자동차를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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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한 공항 활주로에서 첫 시운전을 하고 있는 '블러드하운드 SSC'.

독일은 자동차를 발명하고, 미국은 이를 대중화했다. 그러나 '가장 빠른 자동차'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시속 200㎞, 400㎞, 500㎞에 이어 음속 돌파(1224㎞)에 이르기까지 기록 경신을 도맡다시피 했다. 다음 목표는 시속 1000마일(1609㎞, 마하 1.3)이다. 10월26일 영국의 한 공항에선 이 역사적 임무를 띤 '블러드하운드 SSC'를 처음 시운전하는 행사가 열렸다. 음속 돌파 기록을 세운 지 20년, 이 프로젝트 구상이 나온 지 10년 만의 일이다. 시속 1000마일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15분에 갈 수 있는 속도다.

활주로에서 열린 시운전에서 블러드하운드는 출발 8초 만에 최고 시속 210마일(338㎞)에 도달했다. 음속 돌파 차량을 운전했던 공군 전투조종사 출신의 앤디 그린이 이번에도 운전석에 앉았다. 블러드하운드엔 자동차 엔진과 항공기 제트엔진, 로켓이 탑재된다. 우주, 항공, 자동차 기술이 총동원되는 셈이다. 테스트를 마친 뒤 그린은 "여전히 개발할 것들이 있지만 즉시 반응하고 안정적이며 무엇보다 굉장히 빠른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시운전 행사는 모두 세 차례 진행됐다. 첫날엔 후원자들을 초청한 '후원자의 날', 28일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공공의 날', 마지막 30일엔 학생들을 위한 '교육의 날' 행사가 이어졌다. 방문객들은 차의 내부, 외부를 가까이서 구경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무대 행사와 구역별 전시·체험 행사를 즐겼다.

프로젝트팀은 내년 여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막에서 2차 속도 테스트를 실시할 예정이다. 가능하면 이때 시속 1000마일은 아니더라도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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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아프리카 사막 주행을 하는 '블러드하운드SSC' 상상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들은 왜 굳이 실용성이 없는 시속 1000마일 자동차를 만들려 할까? 기술 과시욕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것만으로 보기엔 시간과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든다. 이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다. 바로 미래세대에게 과학에 대한 꿈과 도전 의욕을 심어주는 것이다. 프로젝트 책임자인 기업가이자 모험가 리처드 노블은 2007년 영국 정부 관리로부터 엔지니어가 부족해지고 있는 교육 현실을 우려하는 말을 듣고 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줄 상징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말에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보자고 생각했다. 1983년 시속 1000㎞ 돌파 차량을 직접 몰았던 그는 1997년엔 음속을 돌파한 '스러스트 SSC'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4가지다. 제1 목표는 학생들한테서 딱딱하고 어려운 스템(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과목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는 것이다. 제2 목표는 학생들이 모험에 동참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면서도 최고의 연구와 기술을 투입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만드는 것이다. 시속 1000마일 목표는 중요도에서 세번째 순위다. 프로젝트팀은 차에 대한 연구, 디자인, 제작, 시험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교사와 학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5000여 학교가 이 프로젝트의 정보를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 참여자간 온라인 커뮤니티도 있다.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가상의 차량을 설계하고 경주를 벌이는 경연대회도 펼친다. 비용은 정부의 지원금과 기업, 시민들의 기부금을 통해 마련한다. 기업들은 후원자로 참여해 프로젝트 완성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한다. 정부, 기업, 학교, 시민이 함께하는 범국가적 공동참여 프로젝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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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하운드 프로젝트에 참여해 모형 제작 실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

프로젝트팀은 이미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이 프로젝트 이후 진로를 바꾸고 공대 지원자 수도 늘어났다고 한다. 블러드하운드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의 65%가 공학이나 과학을 장래 직업으로 생각한다는 설문 결과도 있다. 블러드하운드 프로젝트는 해외에 교육 콘텐츠로 수출되는 성과도 내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인공지능은 이제 분석과 추론은 물론 전략 수립, 예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고영역에서 인간을 따라잡거나 추월하고 있다. 알파고의 후신 '알파고 제로'는 인간이 만든 기보 학습 없이도 바둑 신의 경지에 올라섰다. 전문지식을 갖춘 변호사의 판단력과 의사의 진단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 실험 결과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주식투자 분야에선 이미 인공지능이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을 내쫓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에게 남아 있을 마지막 경쟁력은 창의성뿐이라고 한다. 20세기 규격화된 대량생산 공장시대에 적합한 인재를 키워내는 주입식, 교과목 위주 교육은 이제 효용을 다했다는 평가다. 어떻게 하면 미래세대의 창의성을 쑥쑥 키울 수 있을까? 블러드하운드 같은 프로젝트 교육 방식을 생각해볼 만하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프로젝트에는 집단지성의 협력과 피드백이 있다. 창의성을 키우는 핵심 가운데 하나라 할 질문형 사고는 혼자서 골똘히 하는 것보다 함께하면 훨씬 더 탄탄해지지 않을까? 프로젝트 방식은 과학, 기술, 수학, 미술 등 여러 교과목을 융합해 소화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피드백과 협업이 오가다 보면 해당 분야의 지식은 물론 아이디어, 자신감, 도전 의욕이 다져질 것이다. 요즘 미래세대한테 익숙한 게임과 경연 방식을 곁들이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10년을 목표로 한국형 블러드하운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면, 어떤 걸 선정하는 게 좋을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