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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의 '택시 운전사' | 탈영웅적 저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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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여름 한국일정은 참으로 빡빡했다. 종종 내가 미국에 있는지 한국에 있는지 잊을 정도로, 컴퓨터 앞에서 일해야 했다. 두 권의 책(한 권은 신간, 또 다른 한 권은 개정판)의 마무리 작업, 다양한 주제의 8개의 강연 준비, 그리고 칼럼과 다른 마감 일들을 위한 글쓰기 때문에 눈이 아프도록 작업을 해야 했다. 만나고 싶은 분들과의 약속을 계속 미루면서 컴퓨터에서 작업해야 했던 나는, 미국의 한 동료가 한국에서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에 내가 마치 '글쓰기 기계(writing machine)'가 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2.

그런데 이러한 빡빡한 일정 가운데에서, 내가 했던 일이 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시사회에 갔던 일이다. 이 시사회의 초청을 받았을 때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회신을 계속 미루다가, 마지막 순간에 가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영화의 공식 개봉이 8월 2일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이미 미국에 가 있을 시간이니 지금 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에 나는 한국에 있었지만, 그 당시 한국에 있었던 그 누구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 길은 없었다. 그 당시 떠돌던 '유언비어'라고 하던 이야기들이 사실상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 독일 유학을 가서였다.


3.

〈택시운전사〉는 복잡한 줄거리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너머'의 복잡한 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떠한 의미에서 여타의 글쓰기나 읽기 행위처럼, '영화보기 행위'란 '자서전적(autobiographical)'이다. 많은 사람이 같은 영화를 본다고 해도, 그 '영화 보기'의 경험은 천차만별이다.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자신이 본 그 영화의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화와 '함께' 그 영화를 '넘어서' 생각하기 (thinking with x beyond x)" 의 사유 도식이 적용될 수 있다.


4.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택시운전사〉는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국가가 어떻게 국민을 단지 통제와 지배의 대상으로만 보면서 반인권적 탄압의 무기를 휘두르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현학적인 수사도, 복잡한 줄거리도 필요하지 않은 그 적나라하고 추한 '국가'의 모습을 그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영웅적이지 않은 '평범한 인간'들이 어떻게 가까스로 그 인간됨(humanity)의 모습을 지켜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5.

대부분 우리 인간은 조금씩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조금씩은 못나기도 하고 조금씩은 그런대로 괜찮은 존재이다. 내가 여타의 '영웅적 서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다. 변혁이나 저항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사실상 소수의 '영웅'들에 의하여가 아니라, 이렇게 조금씩 못나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한 개인들이 그 '인간됨'의 모습을 가까스로 지켜내면서, 자신과 타자들에 대한 책임성을 아주 작은 귀퉁이에서 나누는 행위들에 의하여라고 나는 본다. 이 〈택시운전사〉에서 나는 그러한 '탈 영웅적 저항'의 모습들의 일면들을 볼 수 있었다.


6.

서울 택시 운전사인 김만섭, 광주 택시 운전사인 황태술,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는 광주 대학생 구재식, 삼엄한 검문에서 독일 기자를 태운 김만섭의 택시가 광주택시가 아닌 서울택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통과시킨 이름 없는 군인. 이들은 굉장한 영웅적인 모습이 아닌,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 존재 한 귀퉁이에서 자신의 이기적 계산과 이득의 유혹을 넘어서서,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인감됨을 지켜내면서 '저항'하는 이들이다.


7.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희망의 근거는 영웅적인 승리의 보장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가 부여잡아야 할 '희망'의 근거란, 이렇게 조금씩 못나고, 조금씩 이기적인 우리 각자가, 작은 귀퉁이에서라도 '영웅적으로'가 아니라, '가까스로' 자신의 인간됨을 지켜내며 주변의 타자에 대한 아주 작은 '책임과 연대'를 하고자 애쓰는 바로 그 '씨름의 과정' 자체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속의 택시 운전사', 바로 이 모습이 우리가 여전히 부여잡고 있어야 할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미래 희망의 근거가 아닐까.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