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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제국주의'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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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WORD LETTER
Motizova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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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어는 권력이다. 소위 세계화 시대에 들어서서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는, 영어가 더욱 강력하게 '세계어'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인터넷 시대에 '국제적 네티즌'이 되려면 영어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어로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 인구의 1/4뿐이라고 한다. 즉 세계 인구의 3/4은 영어로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소수의 언어가 '세계어'가 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언어는 권력과 직결되어 있다. '언어를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진다 (language holder is power holder)' 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며, '언어 제국주의 (linguistic imperialism)'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는 이유이다. 이 21세기의 '언어제국주의'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어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2.

지난 7월 14일 한 대학에서 하는 공개 세미나가 2시에서 5시 30분까지 진행되었었다. 태국에서 온 교수와 내가 두 사람의 강연자였다. 강연자는 영어로 하고, 통역자가 한국어로 순차 통역했다. 통역이 개입된 모임에서 강연자와 청중 사이에 생동감 있는 교감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상적인 상황이란, 강연자와 통역자 두 사람의 호흡이 아주 잘 맞는 한 팀의 댄서(dancer)같이, 생동감 있는 춤을 함께 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강연자와 통역자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은 '춤'이 아니라, 건조한 강연 '원고'일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연결하기 위해서 청중의 얼굴이 아닌 강연 원고에 눈을 집중하고, 파워 포인트 (PPT)라도 사용하는 강연자라면 더욱 청중의 시선으로부터 배제된다. 청중은 원고에 눈을 두고 있는 강연자/통역자의 얼굴을 굳이 바라볼 필요가 없이, 커다란 스크린 속에 고정된 PPT에 '요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종종 이러한 광경을 관찰하면서, 나는 이렇게 청중과 강연자의 생생한 교감이 부재한 강연장에 있을 때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주제와 연관된 논문 한 편을 숙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뿐 아니라 소위 '글로벌' 프로그램을 하는 비서구 사회의 컨퍼런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3.

이번 프로그램의 공개강연에 참석한 청중은 70%가 한국인이고 약 30%만이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태국 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기 직전에 나는 내가 이중언어구사자이니 통역자 없이, 영어로 하고 그다음에 한국어로 하겠다고 이 프로그램의 담당교수에게 쪽지를 보냈다. 통역자가 개입되었을 때에 언제나 벌어지는 본말과 통역된 말 사이의 간극을 알기에, 내가 강연자와 통역자 역할을 하는 것이 청중과의 거리 좁히는 데에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대한 스크린에 PPT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청중들에게 자료집에 들어가 있는 나의 강연 요약 PPT를 보지 말고, 나의 얼굴을 보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얼굴과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강연자와 청중 사이에 오고가는 "무언의 언어"들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연을 시작하면서, 나는 청중들에게 영어가 자신의 모국어인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한 사람도 없다. 이 세계에서 주변부 언어에 속하여 살아가는 이들의 비애이다. 그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데, 우리는 영어를 해야만 '글로벌' 한 프로그램이라고 간주한다.


4.

비행기에서처럼 언어에도 등급이 있다. 일등석 언어(영어), 비지니스석 언어(독어, 불어, 스페인어 등), 그리고 이코노미석 언어이다. 적어도 일등석, 비지니스석 언어 정도는 되어야 '국제' 세계에서 다른 나라 언어로의 번역과 통역의 가능성이 열린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글을 생산하는 학자들이나 문인들은 자신의 글이 '국내적'인가 '국제적'인가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들은 '국내'와 '국제'의 경계를 전혀 그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어로 글을 생산하는 이들은 언제나 '국내적'일 뿐이다. 그들이 '국제적'으로 되는 것은, 소설가 한강의 경우처럼 오직 유능한 '번역자'가 있을 경우와 같이 '일시적'이며, 대다수는 오로지 '국내적'일 뿐이다. '국제화 시대'라는 표제가 지닌 이 지독한 딜레마가 곳곳에서 작동되고 있다.


5.

이러한 언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누구도 이러한 딜레마를 단숨에 해결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인 '영어 지상주의'에 빠질 필요도 없다. 다만 어떻게 소위 이 '국제화 시대'에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한국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서 한국어를 모르는 타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느냐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사회의 공교육과정에서 우리는 영어를 그토록 오랫동안 배우지만, 여전히 일상적 대화조차 영어로 주고받기 어려운 한국의 언어교육방식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소위 '국제 프로그램'에서 나는 종종 경험하곤 한다.


6.

언어란 '기술'이 아니다. 언어란, 사유세계를 담는 '개념들의 세계'이다. 영어를 배우고자 한다면, '기술'을 터득하려고 하지 말고 풍성한 '개념'들을 일상화하는 것을 우선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미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을 만날 때 종종 내가 경험하는 것은, 아무리 토플이나 GRE 점수가 좋아도, 자기 생각을 담아내는 인문학적 대화를 영어로 하는 것을 참으로 힘들어한다는 점이다. 영어 '기술'은 익혔지만, 언어란 사실상 자신의 사유세계를 담아내는 '개념들의 구슬꿰기'라는 것, 또한 비판적 사유가 폭넓은 대화를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한국의 교육체제 속에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나 역시 독어와 영어, 이 두 개의 다른 언어 세계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이 점을 참으로 절실하게 경험했다.


7.

한국어는 이 세계에서 지극히 주변화된 '변방의 언어'다. 그런데 한국어로 쓰인 글들을 '국제어'로 번역하는 데에 한국 국가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니 다른 나라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이 '국제화 시대'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복합적으로 분석해볼수록 착잡하다. 그리고 이 현실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여전히 국가나 체계화된 제도들이 아닌, 개별인들에게 남겨진 과제라는 것-부인할 수 없는 착잡한 현실이다. 노벨문학상과 같이 소위 '국제적 상'이 지닌 딜레마는, 그 상의 선별과정에서 작동하는 '언어제국주의적' 구조를 벗어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