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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시위의 극장'이 아닌 '사회정치적 혁명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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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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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정으로 '떠남'이란 이제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지금 벨기에 브뤼셀 옆에 있는 르벵(Leuven)대학교에 학회 참석차 와 있다. 육체적 몸은 유럽에 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을 떠날 수도 또는 한국을 떠날 수도 없다. 인터넷 시대에 한 지리적 장소를 '떠남'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곳 르벵의 저녁에 나는 이 물음을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몸은 유럽에 있지만 11월 12일의 광화문, 그리고 트럼프 당선과 관련된 미국에서의 전국적인 시위에 관한 뉴스들로부터 떠날 수 없다. 진정한 떠남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의 촉각은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하는가. 이제 이전에 작동되던 경직된 국가적/지리적 경계는 모호해졌으며, 이 세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양한 인간들이 서로 얽히고 섥혀서 거주하는 '공동 거주공간'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함께-살아감'의 과제는 국가적 경계를 뛰어넘는 우리 모두의 긴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자국민 이익중심주의나 국수적 애국주의가 위험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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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중산층의 분노'의 소산이며, 따라서 '중산층의 혁명'으로 보면서 트럼프 당선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다. '혁명'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떤 사건에 '역사적 정당성과 의미'를 자동적으로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 '혁명'은 과연 어떠한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조명하면서, 그 추구가 '나'만 존재하는 고도의 이기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나와 너'라는 '공공 선(common good)'을 지향하는 인류의 보편가치들을 확산하기 위한 것일 때, 비로소 그 혁명이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면서 노출되었던 갖가지 오류와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은 '모든' 인간의 '평등성'과 개체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이라는 인류의 보편 가치를 사회정치적으로 확산하고 제도화하고자 하는 것이었기에 '역사적 혁명'으로 의미부여가 된다.

3.

그런데 광화문에 모인 100만의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가치관'을 확산하기 위하여 모였을까. '대통령 퇴진'이라는 표면적 이유만이라면, 사실 100만의 운집은 광화문을 '가시성의 극장(theater of visibility)'의 의미 정도로 제한될 것이다. 그러나 광화문이 그러한 '시위의 극장'의 의미를 넘어서, '사회정치적 혁명 공간'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우리는 치열한 분석과 토론, 대화와 자기학습을 꾸준히 병행해야 한다. '몸의 저항'만이 아니라 그 몸들의 저항을 유의미하게 하기 위한 '이론적/분석적 저항'의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퇴진을 요청하게 된 '박근혜-최순실-게이트'의 부당성에 대한 인식이, 보다 복합적인 의미의 '보편가치들' 즉 다층적인 사회적 약자들(장애인, 저변층, 미등록이주민들, 여성, 성소수자들 등)의 인권과 사회보장의 확산 등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과 함께하는 인식과 연계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정의와 평등이라는 보편가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제도화하는 사회정치적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100만 광화문 시위'는 '박근혜-퇴진'의 요청을 통해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무엇인지, 그 사회는 어떠한 가치관을 실현하고 제도화하는 사회여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자기학습과 공동 토론을 통해서 진정한 '연대의 정치학'을 실현하는, '사회정치적 혁명 공간'의 창출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4.

이 지점에서 '평화시위-폭력시위'라는 틀 자체는 이미 근원적인 오류를 지닌다. 첫째, '시위'란 한 사회에서 권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의 최후의 저항행위라는 점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평화-폭력'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도식은 사실상 권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약자들에게 던지는 '정치적 덫'의 기능을 한다. 시위현장에서의 폭력은, 대부분 권력을 지닌 이들이 약자들의 '폭력'을 유도하여 야기되곤 한다. 이런 경우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폭력-일반론은 거꾸로 약자들에게 강력한 '인식적 폭력(epistemic violence)'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이미 '통치적 폭력'이 보이게 보이지 않게, 그러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러한 시위 정황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누구의 폭력에 함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평화시위-폭력시위'라는 틀은, 변혁을 위한 접근의 다양한 전략들을 외면하고 '전략의 총체화(totalization)'의 결과를 낳는다.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접근은 정황에 따라서 각기 다른 전략이 요청되기에, 하나의 방식만을 절대적인 전략으로 내세우는 것은 사실 변화시키고자 하는 기존질서에 결국 순응하는 논리로 귀속되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예인들의 공연으로 웃고 즐기기만 하는 축제방식만을 하나의 절대적 평화시위 전략으로 고정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5.

100만 광화문 시위가 '평화적인 축제적 시위'였다는 것, 그 자체가 그 광화문의 역사적 의미를 자동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화시위'라는 것만으로 자기만족하는 것의 위험성은 '가시성의 정치학(politics of visibility)'의 덫에 빠지게 한다. 100만이 모여서 축제적 분위기에서 '평화시위'는 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그 100만의 사람들이 여전히 성차별, 장애차별, 성소수자차별, 외국인차별, 종교차별, 저소득층차별 등으로 점철된 가치관을 가지고 정치가를 뽑고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한다면, '100만 시위 광화문'은 한국역사에서 진정으로 의미로운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자리매김을 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가 치열하게 씨름해야 할 물음은, 이 광화문 시위는 궁극적으로 '어떠한 가치관을 확산하고자 하는가'라는 것이다. 이 물음과 대면하고 고민하지 않을 때에, 제2의, 제3의 '박근혜-최순실'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양산하는 사회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6.

몸은 유럽에 있지만 나의 사유와 존재함은 세계 곳곳에 있다.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인지 모른다. 자신의 물리적 고향에서 편안한 '고향성'을 느끼는 것, 이것은 점점 불가능할 뿐 만 아니라 '비윤리적'인 것이 되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아도르노의 "자신의 고향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비윤리적이다(It is unethical to be at home in one's home)"라는 말은 이 다층적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도 많은 물음을 던진다. 고향에서 느끼는 '탈고향성'은 이제 우리의 '윤리적 과제'이며 '사회정치적 책임'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편한 '탈고향성'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광화문에서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나는 그 '광화문 열기'가,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정의와 평등이 제도화되고 확산되는 것으로 전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