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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문에 바란다 | '정체성의 표지'의 양가적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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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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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시간에 '정체성의 정치학' 또는 '라벨의 압제성 (tyranny of labels)' 등의 주제로 논의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여러 학생이 자신이 속한 또는 자신이 사용하게 되는 '정체성의 표지'가 어떠한 기능들 (순기능과 역기능)을 하는가에 대하여 토론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사회에서 소위 '중심부'를 구성하는 요건, 즉 백인-남성-중상층-이성애자-비장애인-기독교인 등의 요건을 모두 지닌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고백'을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자기들과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룹이 있는데, 자신들을 지칭하는 소위 '정체성의 표지'를 누구도 찾으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찾으려 해도 찾기 힘들다고 하는 '고백'이다. 흑인 학생은 '흑인'이라는 표지, 멕시코에서 온 학생은 '멕시코인' 이라는 표지, 성적 소수자들은 'LGBT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또는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표지 등을 달고 산다. 그런데 왜 '중심부'적 요건을 모두 지닌 그 학생은 사용할 수 있는 표지가 없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특정한 표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표지는 두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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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종류의 정체성 표지는 사회적으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붙여주는 표지이다. 이렇게 외부에서 누군가에게 붙이는 표지는 주로 '중심부'에 속한 이들이 '주변부'에 속한 이들을 비하하거나 자신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분리의 방식으로 붙여진다. 이럴 때 그 주변부인들은 '말해지는 객체(spoken object)'가 된다. 다인종 사회가 아닌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인종적 표지들은 대중화되어 있지 않지만, '동성애자' '여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또는 '노인' 등의 표지는 여전히 '중심부'에 속한 이들이 '주변부'에 속한 이들을 지칭하면서 그들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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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여기자' '여선생' '여목사' '여류작가' '여성학자' 등의 표지를 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서도 버젓이 쓰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또 다른 한국 특유의 것이 있다. 그것은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 옆 괄호에 '나이'를 넣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들은 '나이'만이 아니라 '여'라는 표지가 덧붙여진다. 앞에 '여자'라는 표지를 붙임으로써 아무런 표지가 없는 이들, 즉 남성은 그 사회적 중심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기자-여기자, 작가-여류작가, 교수-여성교수 등의 분리된 표지는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 그 기능을 느끼기 위하여 '상상 속의 실험'을 하면 된다. 예를 들어서 기자-남기자, 작가-남류 작가, 목사-남목사, 교수-남성교수 등으로 여성이 아닌 남성들에게 특별한 표지가 붙여지는 '상상 속의 실험'을 하면, 얼마나 이러한 표지가 중심과 주변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가치구조를 지속시키고 있는지, 동시에 표지가 없는 이들이 이 사회의 중심부에 속한 이들이라는 가치를 암묵적으로 강화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4.

두 번째 종류의 정체성 표지는 그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는 주체 (speaking subject)로서 자신의 주체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표지이다. 이전에 부정적인 의미로 간주되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뒤집어서, 자신을 구성하는 긍정적 요소로 부각하면서 스스로 그 표지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흑인성'이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사용되던 표지를 스스로 들어서 '나는 흑인이다, 흑인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라는 자기의 주체적 선언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인종적, 성적, 젠더 소수자들 등의 소위 '정체성의 정치학'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다. 이전에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가치를 뒤집어서, 가치의 전도를 통해서 오히려 긍정의 힘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의 표지들을 항구적으로 사용할 때에, 역시 순기능만이 아니라 역기능도 가져온다.


5.

매우 복잡한 이 '정체성의 정치학(politics of identity)' 이 지닌 양가적 의미를 이 제한된 공간에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지난주 내가 학생들과 이 '표지(label/ marker)'의 양가적 기능에 대하여 몇 시간을 논의했었는데, 한국의 매체에서 나를 '여성학자,' '여성신학자,' 또는 '여성교수' 라고 지칭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역삼동 살인사건에 대한 나의 페북 포스팅이 여러 곳에서 인용되기도 하고 그대로 실리기도 하면서, 나는 학자가 아닌 '여성학자,' 교수가 아닌 '여성교수,' 또는 신학자가 아닌 '여성신학자' 등으로 불려지면서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그 표지가 '자연스럽게' 붙여져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한국사회는 여전히 여성에게 특별한 표지를, 남성에게는 그 '표지의 부재'를 통해서 그 남성중심성을 여전히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6.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는 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현실의 창출'이라는 기능과 책임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는 한국의 신문들이 이러한 차별과 배제, 중심부과 주변부 등이 어떻게 아주 사소한 것 같은 것에 의하여 유지되고 강화되고 '자연화'되는가에 대한 예민성을 작동시키고 신문에 반영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다. 그래서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들이 한국사회의 '새로운 현실의 창출'에 기여하는 역할을 보다 진지하게 수행하게 되기를 바란다. 한국사회의 차별구조들인 '나이차별주의(ageism)'와 '성차별주의'의 현실을 넘어서 보다 평등한 현실의 제시와 창출은 거창한 것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불필요한 곳에도 언제나 사람의 생물학적 나이를 표시하고, 덧붙여서 여성에게만 유독 그 생물학적 여성을 드러내는 '여'라는 표지를 덧붙이는 '관행'의 폐지와 거부와 같은 사소한 변화를 통해서도 그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